지금은 장례일정에 쫓겨 발인제를 소홀히 지내고 있다. 예전에는 발인제가 집에서 마지막으로 지내는 제사이기 때문에 성대하게 제수를 차리고 삼헌으로 지냈다.
발인제는 상주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제주(祭主)가 되어 지낸다.
상여는 일반적으로 장례일 아침에 꾸미지만, 호상(好喪)일 때 발인전날 꾸미기도 한다. 이 때 빈상여를 메고 마을에 사는 친척을 찾아다니며, 친척들은 상두꾼에게 술과 음식을 접대한다. 이를 ‘재도듬놀이’ ‘빈상여놀음’ 이라고 하는데, 용인지역에서는 ‘걸걸이’로 부르고 있다.(제보: 김한경, 남사면)
상여가 꾸며지면 상주들은 발인제를 지내고, 발인을 시작한다. 발인제는 상여가 나가는 날 집에서 마지막으로 지내는 제사이기 때문에 성대하게 차려 삼헌으로 지낸다. 발인제는 상주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제주(祭主)가 되어 지낸다. 그 절차는 다음과 같다. 우선 분향을 하고 참석자들이 참신을 한다. 삽시를 하고, 초헌하며, 이 때 전저(奠箸)를 한다. 잔을 올린 후에 축문을 읽는다. 제주가 재배하면 참석자 모두가 재배한다. 다른 사람이 아헌, 종헌을 올리고, 합반개(合飯蓋), 낙시저(落匙箸)의 순서로 마친다. 발인제를 지낼 때 상주들 앞에 놓는 “공석베개”는 상여에 실어 노제나 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역시 상주들 앞에다 놓는다. 가마가 집을 떠나기 전 상두꾼들은 상여를 메고 집을 향하여 3번 절을 하고 뒤로 나간 후 장지로 떠난다. 절을 하는 이유는 집과의 마지막 이별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상주들도 같이 절을 한다. 오늘 상두꾼은 14명으로, 상여 앞, 뒤쪽에 각각 4명이 섰고, 좌, 우측에 각각 3명이 섰다. 선소리꾼의 선소리에 맞추어 상여가 이끌려 나가고, 장의를 알리는 명정이 맨 앞에 서고, 흰 베로 만든 공포가 뒤따른다. 장지로 가는 도 중 친척집을 지나 갈 때는 노제를 지낸다. 노제는 가까운 친구가 차려주기도 하는데, 상에는 고기, 포, 술 등 간단한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준다. 이는 예서에 의하면 친전(親奠)이라고 하는 절차이다. 고인의 생시 행적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에 차마 그냥 지날 수 없어서 전을 올려 고인을 편하게 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이 때에도 상여는 3번 절한다. 절을 할 때는 상여 앞쪽에 있는 상두꾼들이 다리를 구부렸다가 선소리꾼의 장단에 맞추어 편다.
용인지역에서는 대부분 장사갸??두 번 정도 노제를 지냈으며, 장지까지 가는 도중 3번 휴식을 한다. 상여는 짝수로 휴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여가 가파른 길이나 다리를 지나 갈 때는 힘이 없어 못 올라가니 상주들이 정성을 보일 것을 요구한다. 상주들은 돈을 주기도 하고, 절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앞쪽에서 상여를 끌기도 한다. 상여를 메어서 수렴된 돈은 청년회에서 마을을 위한 경비로 쓴다.(전지역)
매장하는 관습에는 탈관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용인 지역에서는 시신을 매장할 때 관을 그대로 묻는 법과 관을 해체하고 시신만 묻는 방법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다. 전통적인 유교식 장례를 따르는 집안에서는 관을 해체하고 시신만 안장한다. 이를 “탈관한다”고 말한다. 남인계 일부 집안에서나 개신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는 관을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안장한다. 탈관하는 경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난해서 관을 두껍게 만들지 못한 경우, 관이 썩으면 시신과 섞여 해롭다는 관념, 풍수설의 영향 등이 주된 이유이다.
초분은 주로 풍수사상과 효사상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매장 풍습 가운데 초분(草墳)이 있다. 초분은 근래까지 전라도 서해 도서지방과 남해 지방【?행해진 장례 풍속으로 묘지에 이장하기 전에 시체를 짚으로 싸고 이엉을 덮어 비를 가리게 하여 썩힌 후 탈육(脫肉)된 시신을 땅속에 매장하는 이중장제(二重葬制)이다. 보통 ‘초병’ ‘초빈’이라고 부르며, 겨울철에 땅을 팔 수 없고 떼를 못 입히기 때문에 초병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초병을 할 때도 상여가 나가며, 초병과 무덤자리가 멀리 떨어져 이장을 할 때도 상여를 맨다. 그러나 초병과 무덤자리가 가까운 경우에는 더 이상 상여를 매지 않는다.
초분장을 하는 경우는 본래 호상(好喪)일 경우에만 행해지나, 임신 중인 부인이 죽어도 초분이 이루어졌다. 초분을 이장하는 시기는 주로 2월 영등달에 행해진다. 이장하기 전 초분을 덮은 이엉을 1년에 한 번 쯤은 갈아주며, 명절이나 제사 때면 일가 친지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제를 올리고 표시로 이엉 위에 솔가지를 꺾어 꽂아 둔다. 이장 시기는 3년이지만 5년 또는 10년 후에 이장하기도 한다. 남해안 지역에서 초분을 하는 이유로 부모가 죽었다하여 바로 땅에 묻는 것은 불효라는 효성의 표현, 음력 정월과 3월에는 땅을 개토할 수 없다는 풍수사상, 남자가 바다에 나갈 때 부모가 돌아가시면 여자가 묻을 수 없고, 항해 중인 남자가 돌아와 부모의 시신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이유를 들고 있다.
용인지역에서도 1930년대에는 초분이 행해졌다. 제보자들에 의하면 시신을 모시는 연대가 맞지 않거나, 질병으로 죽은 시신을 장례 지내기 곤란할 경우, 초빈을 마련했다고 들은 바 있으나, 실제 본 적은 없다고 한다. 구성읍에서는 서울우유공장 울타리 부근에 ‘최빈’을 했다고 한다.(제보자: 최한준, 구성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