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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한 무정형 화가

용인신문 기자  2003.05.1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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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관 김윤순관장과 떠나는 세계미술관기행 33 모네의 집

■동양식 정원을 자랑하는 모네(Monet)의 집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베르니(Giverny)에 모네는 1883년 한채의 집을 세를 얻었다. 2층 집엔 다락방 두 개가 있고 헛간을 개조해 아틀리에로 사용했다. 그 집은 프랑스 사람들이 즐기는 잘 다듬어진 정원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인 0.96 ha의 정원이다.
모네는 결국 지베르니의 집을 샀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노적가리’나 ‘포플러’등 빛과 자연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많다.
나는 지베르니의 모네의 집(미술관)에서 일본의 판화(우기요애)가 걸려 있어 놀랐다.
동양의 정서를 좋아하고 일본정원에 있는 일본식 둥근 다리모양은 일본에서도 보기 드물게 완벽하게 만들어 동양인을 놀라게 한다. 연못에는 모네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련이 많다. 수련의 연작이 바로 이 정원에서 그려졌다.
모네가 죽은 후에도 이 집은 계속 모네 가족의 소유였다가 1966년 모네의 둘째 아들인 미셀 모네의 뜻에 따라 프랑스 정부에 기증되어 1980년 대중에게 공개 되었다.모네는 수련 연작으로 인해 20세기의 대표작가의 한 사람으로 부각 된다.
이 건장한 남자는 늙어 보이지 않는다.
시골사람 차림의 옷 입기를 즐겼으나 당당한 풍체로 한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고 얼굴에는 늘 위엄이 흐른다. 언뜻 그의 모습은 족장(族長)이나 현인을 떠올리게 한다. 또 그의 당당한 모습을 보면 큰 어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도 주위 사람들의 모함이나 가난으로 한때 많은 어려운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모네는 세기가 바뀌는 즉 20세기를 맞이할 때는 60대 였다.
그제야 그는 명예를 얻었고 경제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 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도 받을 만큼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언제나 그림 그리는 화가로 끊임 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화가로서 남고 싶어 했다.

■동양판화에서 조형혁신 소재 응용
모네는 1860년대에 일본판화(우기요에)의 수입으로 동양의 조형의 미 그리고 기법등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일본판화에서 조형혁신의 소재를 발견한 미술가는 ‘마네’와 ‘드가’만이 아니었다.
1875년에 모네는 일본의 기생(게이샤)처럼 꾸민 ‘카미유’를 그렸다.
1876년 제 2회 인상주의 展에 출품된 ‘일본여인’은 화려한 부채와 붉은색 일본옷(기모노)를 표현?‘일본풍 회화’의 서정시이다.
그무렵 모네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지베르니에 동양풍의 정원을 만들고 당시 동양을 동경하던 애호가를 지베르니에 찾아오게 했다. 특히 일본의 그림을 보게하고 일본식의 정원을 거닐게 하고 일본식 다리앞에서 모네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런 행위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또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그림을 소개하고 당시 싸롱의 화가들을 초대하고 정원을 자랑하며 즐겼다. 폴 세잔(1839-1906)과 모네는 같은 시대의 작가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사이였다.
세잔은 어느 미술 전문지에 “나는 살아있는 화가들을 무시한다. 다만 모네와 르노아르만은 진실로 높이 평가하고 존경한다.”라고 했다. 또 모네는 1894년 11월 지베르니에서 열린 오찬에 당시 유럽에서 유명한 예술인들을 초대했다. 음악인 미술인 연극인 문학인 그리고 평론가등 그 중에는 세잔, 로뎅, 클레앙소도 있었다. 모네는 세잔을 로뎅에게 소개 했다고 한다.
오늘날 세잔을 구성화가로 모네를 무정형 화가로 말한다. 회화상에서 색채의 변화를 같이 연구하는 작가로 중요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