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표랑 함께하는 향토문화재 탐방팀을 모집합니다. 초등 4년 이상에서 중등부 학생 2-3명으로 제한하며, 가족이 함께 해도 좋습니다. 매월 첫째 토요일, 셋째 일요일에 떠납니다. 용인신문사 문화부로 접수하세요. 문의는 홍순석교수님(hongssk@kangnam.ac.kr)에게 하세요.
“난설헌시비 탁본이 제일 재미있어요!”
8월 14일 오전 10시, 은표, 한수진(산양초 6년), 한수경(산양초 4년)이 원삼면 맹리 허균 선생묘를 찾아갔다. 이번 탐방은 묘역 조사와 비석탁본 실습에 중점을 두었다.
허균의 묘소 앞을 겨우 비집고 서서 묵도로써 예를 표하다.
허균(許筠;1569-1618) 선생의 묘는 원삼면 맹리 양천허씨 세장지에 있다. 본래 과천지역에 있었던 것을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인하여 원삼면 맹리 안골에 이장한 것이다. 이 당시 과천에 있던 허엽·허봉·허성·허균 등의 묘소와 석물을 모두 옮겨 놓았다. 이전한 것이라는 이유로 시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35년간이나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강릉과 장성에서 허균의 홍길동전을 캐릭터화해서 지역의 홍보물로 내세우고 있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서 관리가 엉망인 것은 당연하다. 아이들 키만큼이나 자란 잡초 때문에 허균의 묘소 가까이 갈 수가 없을 정도이다. “여기가 허균의 묘소예요?”(수진) “너무 했다. 그렇죠”(수경) 안내판은 고사하고,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상황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허균의 묘 앞을 겨우 비집고 서서 묵도로써 예를 표하였다. “허균선생에 대선 그늘에 가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이곳에서 느낀 소감부터 말해보자” “우리 엄마가 양천허씨인데요. 허균선생 후손이래요. 그래서 더욱 반가와요”(수경) “홍길동전은 어데서 썼어요?”(수진)“글쎄. 어데서 썼는지 자세하지 않아. 허균이 홍길동전을 썼는지 안 썼는지도 논란이 있거든. 어떻든 홍길동은 장성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라고 해서 장성에서는 생가도 복원했어. 강릉에서는 홍길동의 캐릭터가 시의 상징물로 지정되었고” “허균이 천주교 신자였다면서요?”(수진) “어 그래. 허균은 불교·도교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천주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대”
당대에는 이단자로, 오늘날에는 선각자로 평가받는 허균
허균은 중국을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선진문화를 조선에 소개하였고, 우리문화를 중국에 널리 소개하여 자긍심을 제고하였다. 악응潔駭?서얼차대를 철폐하려 노력하였고, 서민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어려움을 대변하였다. 실패하였지만 백성이 근본으로 인정되는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야무진 계획도 도모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치의 최종 목표는 백성들의 복리증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뜻은 당시에는 이단자의 황당한 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이상은 홍길동전과 여러 글에 전할 뿐 실현되지 못하였다. 역사가는 그를 당대에는 이단자로, 오늘날에는 선각자로 평가받는 대표적 인물이라 평가하고 있다.
허난설헌의 시비를 탁본한 것이 제일 보람 있어요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고속도로 길섶에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시비만 허씨네 묘역에 옮겨져 있다. 한 길 이나 되는 풀 속에서 아이들은 겨우 안식처를 찾았다. 난설헌의 시비가 있는 곳은 비교적 평평하고 그늘진 곳이었다. 한문으로 된 비석이라서 아이들은 내용을 알지 못했다. 허난설헌의 시비 전면 상단 우측에는 ?閒見古人書?라는 친필이 가늘게 새겨져 있다. 탁본을 해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후면에는 허난설헌의 대표적인 시작품이 새겨져 있다.
내용보다는 난설헌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기에 탁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