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6살 때 <강아지똥>은 어느 서점에서건 쉽게 눈에 띄었고 신문과 잡지에 소개된 글도 자주 보았다. 그래서 였을까? 당연히 우리 집에도 한 권 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책을 샀다.
처음으로 책을 읽어줬을 때 아이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시큰둥했다. 아이가 집중할 때 보이는 미간의 찌푸림도 그림에 열중하는 모습도 전혀 볼 수 없었다. 단지 ‘똥’이란 단어가 자주 나오다 보니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듣는 정도였다. 책 뒷편에 실린 아동문학평론가의 글을 아이에게 설명해줄까 하는 조바심도 있었지만 6살 배기의 마음을 건드리기엔 너무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려니 하고 책꽂이 한 켠에 밀어 넣었다.
그 후로 아이는 아주 가끔씩 <강아지똥>을 들고 와서는 읽어달라고 했다. 오랜 시간 들여다보면서 그림이 편안해져서 였는지 아이도 편안하게 책 속에 들어갔다 나오곤 했다. 그렇게 여덟 살이 된 어느 날 아이가 불쑥 물었다. “엄마, 그럼… 강아지똥은 없어진 거네? 민들레가 돼버렸으니까…….” ‘죽음으로써 부활하는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을 아이는 이렇게 표현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쳐다본 아이의 까맣고 하얀 눈은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본문 중에 ‘강아지똥’이 비를 흠뻑 맞으며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는 장면만큼이나 아이의 말은 나를 감동시켰다. 아이에게 말을 걸어 뭔가 더 끄집어내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맨 처음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었을 때처럼 꾹 참았다.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 깨닫는 행복한 권리를 빼앗고 싶지 않아서가 첫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로는 다시 한번 <강아지똥>으로 아이에게 감동 받고 싶은 욕심에서 였다. 지금도 난 아이의 눈에 담긴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같은 책이라도 여러 번 듣고 천천히 책의 깊이에 빠지는 아이의 마음을 닮고 싶다.
아이와 함께 읽은 책들은 둘만의 이야기거리와 추억을 만들어 가며 때론 유쾌하고 행복한 암호가 된다. 이제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여전히 책을 읽어달라며 그림책을 들고 온다. 고학년이 되어도 아이와 나를 이어주는 이 소중한 끈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오늘 밤에도 난 내 목소리에 집중하는 아이의 찌푸린 미간을 맘속으로 예뻐하며 책을 읽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