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표랑 함께하는 향토문화재 탐방팀을 모집합니다. 초등 4년 이상에서 중등부 학생 2-3명으로 제한하며, 가족이 함께 해도 좋습니다. 매월 첫째 토요일, 셋째 일요일에 떠납니다. 용인신문사 문화부로 접수하세요. 문의는 홍순석교수님(hongssk@kangnam.ac.kr)에게 하세요.
정려각 한 쪽은 왜 비어 있어요
정려(旌閭)는 충신·효자·열녀 등에 대하여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기리던 일을 말한다. 집을 세워 정려 사실을 판각하여 현판을 걸어 놓은 곳은 정려각이라 한다. 용인시에는 아주 많은 정려각이 있다. 그 만큼 충효의 고장임을 증명한다. 갑신년 새해 첫날에 은표랑 홍예은(용인중 2년), 홍소은(용인초 6년)과 유복립정려를 찾았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 유복립
유복립(柳復立:1558-1593)의 정려각은 양지면 송문리 산 124-2에 있다. 1997년도에 용인시 향토유적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유복립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서(君瑞), 호는 묵계(墨溪)로, 조선초기의 문신 유의손(柳義孫)의 후손이다. 송문리 주변에 거주하는 전주유씨들은 모두 묵계공파 후손들이다. 유복립은 명종 13년(1558) 양지현 송문동(양지면 송문리)에서 출생하여, 종부시 주부(宗簿侍主簿)로 벼슬길에 올랐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진주성(晋州城)을 지키고 있던 외삼촌인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金誠一) 휘하에 들어가 왜군에 맞서 싸웠다.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왜군의 대공세에 맞서 분전하였으나, 끝내 성이 함락되자 6월 29일 김천일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숙종 45년(1719) 민진후(閔鎭厚)의 주청으로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영조5년(1729) 명정(命旌)되어 고향인 양지현 송문동에 정려문이 보존되어 있다. 중앙에 충신 유복립을 정려한다는 내용의 정려문이 세워져 있고, 뒷면 벽체 중앙에는 영조 22년(1746) 대제학 이재(李縡)가 찬하고 이조참판 신만(申晩)이 쓴 정려기가 있다. 좌측에는 안동권씨 열녀문이 세워져 있는데, 정문(旌門)및 『양지군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영조 29년(1753)에 명정(命旌)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려각 한쪽을 비워둔 사연
지금의 정려각은 1999년 7월 보수하였으며 맛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설립되어 고설삼문(高設三門 )형식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정평주초 위에 민흘림 원주를 세웠고, 좌우 벽체에는 방풍관이 있다. 좌우와 후면 벽체는 회벽으로 마감했으며, 전면은 홍살창으로 마감하였다. 삼문 형식을 갖춘 이 정려각엔 우측의 1칸 정도를 비워 두었다. 다른 문중의 정려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이다. 이 정려각을 관리해 오고 있는 후손 유한무씨의 모친(김해김씨,72세)께서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전주유씨 문중 가운데 누군가가 충신, 열녀, 효자가 나오면 그 자리에 정문을 걸기 위한 배려라는 것이다. 2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가문에서는 그 같은 인물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 “할머니가 정려를 받으시면 되잖아요”(은표) “내가?”김씨 할머니는 당혹해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야” “그럼 누구에게 주는 거예요”(소은) “나라에서 임금이 인정할 정도 뛰어난 행실이 있어야 되는 거래”(김씨할머니) “여기 집안은 대단한 것 같아요. 정려문이 두 개나 되니까”(예은) “우리 정려문 현판의 한자를 읽어보자. 우선 가운데 있는 것부터” 정려 현판에는「忠臣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行朝奉大夫宗簿侍主簿柳復立之閭」좌측엔 「烈女故學生柳淳妻孺人安東權氏之閭」라고 기록되어 있다. “맨 앞에 충신이라는 글자가 보이지? 바로 충신에게 내린 정려야. 옆에 있는 현판에는 열녀라는 글자가 있고. 열녀에게 내린 정려라는 뜻이지”
충신과 열녀만 정려를 내렸어요?
“그럼 충신과 열녀만 정려를 내렸어요?”(예은) “아니지 효자나 효부에게도 내렸어” “효부는 뭐예요?”(은표) “시집가서 시부모에게 효도를 잘한 사람을 효부라고 하잖아”. “그런 정려도 있어요”(소은) “물론이지. 아. 이 동네에 효자 정문이 있어. 그곳에도 가볼래” 아이들은 호기심에 선뜻 나섰다. 바로 송문리에 효자 송지렴(宋之濂)의 정문이 있다. 유복립 정려각에서 맞은 편 동네에 있는 셈이다. 송지렴의 효자 정문은 거의 퇴락한 모습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탓인지, 관리 상태가 부실하다, 정려각 안에는「孝子學生宋之濂之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맨 앞에 효자라는 글자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바로 효자 정문임을 알았다. “이제 정려에 대해서 알 수 있겠지” “정려에는 어떤 것이 있나? 아는 사람” “충신 정려, 열녀, 효자 정려 아니예요”(소은) “그래, 옛날에는 충효열(忠孝烈)이 중요한 도덕적 규범이었어.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이러한 정려는 왜 세워요”(예은) “정려를 받은 가문의 자랑이고, 후세 사람들에게도 그처럼 행동하라는 교훈적 의미도 있고, 그래서 세우는 종傘?“여기서도 제사 지내요?”(은표) “여기는 제사지내는 데가 아니야. 사당처럼 생겼지만 제사지내는 곳은 아니야”.“그럼 왜 집을 만들어 놨어요”(은표) “ 정려 현판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한 것이지”
우리 집안에도 정려가 있으면 좋겠어요
이번 답사에서는 아이들에게 효행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도 함께 있었다. 우선 답사에서 느낀 점을 이야기하였다. “정려라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예은) “우리 집안에도 정려가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소은) “부모에게 효도를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은표) “정말?. 그래 그러면 효도가 무엇인지 말해봐” “힘들어도 부모님을 도와드리는 거 아니예요”(소은) “걱정 안 끼쳐드리는 거”(예은) “안 아픈 거”(은표) “그래 그런 것들이 모두 효도하는 일이야. 아마 공통점은 부모에게 걱정을 안 끼쳐드리는 거라 할 수 있지. 공부 못하거나, 아프거나 하면 부모들이 걱정하잖아. 너희들은 학생이니까 아프지 않고 공부 잘하는 것이 곧 효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