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상
지금으로부터 767년전인 1232년 고려 고종 19년 8월, 몽골 태종의 명령으로 살례타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몽골군이 고려에 쳐들어와 그해 12월 16일 현재 남사면 아곡리인 처인부곡에서 전투를 가졌다.
김윤후 승장과 처인부곡민이 몽골군과 싸웠던 처인성이 과연 어디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요즘,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와 내 견해를 정리해 본다. 몽골군이 수주부(옛 수원) 용주사 부근을 함락하고 태안-영통-동탄-신리-한봉산 서북쪽 대지골을 거쳐 거의 일직선상에 있는 아곡리로 쳐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몽골군은 형진농원 산과 형진농원 뒤에 있는 뒷골 건너마을 뒷산에도 진을 쳤다 전한다. 실제로 형진농원 개발시 화살촉이 많이 발견됐다하니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형진농원 뒷편 어산 밑 골자기인 뒷골은 성지골 승지골이라 전해 내려오기도 하며 이곳에는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다고 전한다. 성지골, 승지골이란 지명은 성이 있는 곳, 싸워 이긴곳, 승지가 난 곳이라는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데 이 부근에 대한 연구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뒷골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간 새잡골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도隙? 끌어 집안이 망해 놋그릇을 전부 우물에 묻고 도망해 날이 흐리면 서걱서걱 놋쇠 우는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또 맞은편 수탁골에는 놋그릇을 우물에서 많이 캐내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몽골군이 쳐들어와 재산을 우물에 감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처인성이 일야성축이란 말이 전해온다. 다급해서 하룻밤에 쌓았다는 뜻이다. 성을 어떻게 하룻밤에 쌓았나 하는 의구심을 가질수도 있으나 그만큼 다급하게 쌓았다는 뜻일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수원을 함락하고 군창인 처인성을 침략해 오는 길은 높은 산이 거의 없고 평야지대가 많아 기마전술이 뛰어난 몽골군은 반나절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며 다만 신리에서 한봉산 서북쪽 대지골로 넘어오는 길만 약간의 장애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이 길은 우마차가 다니던 길이라 전해온다. 6. 25 때도 인민군들이 이 길로 후퇴를 했다고 전해온다.
이와함께 몽골군이 형제봉을 높게 쌓아 위에서 아래로 공격해 쉽게 승리를 장담했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몽골군이 쌓은 형제봉이 어느산을 지칭하는 지 정확하게 알아낼 필요가 있다. 전투가 과연 어디에서 있었을까. 추측에 불과하지만 평지토성 뒷편 전원주택이 있는 곳, 즉 후리고개라고 불리는 그곳과 성 서북쪽 형제봉 권오명씨 집이 있는 부근의 고새울골이 아닌가 싶다.
후리고개는 후려잡다, 한 번에 공격해 기세를 잡다라는 뜻이라하니 처인부곡민이 매복해 있다가 몽골군을 후려잡은 곳이어서 후리고개라 생각된다. 고새울골에서 고새는 그새, 그동안 등 짧은 시간을 말하고 울골은 사납게 덤벼들어 싸운다는 뜻이라니 추운 겨울날 일야성축으로 성을 쌓았더니 고새 고동안에 쳐들어와서 울골질했다는 뜻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