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평범한 삶 속에 투영된 선생의 발자취는 비범노성한 향토인의 전형으로서 이제 다시 그를 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충격이자 슬픔이다. 이런 것을 두고 인생무상의 허탈감이라고 하는가 보다.
온 몸을 던져 용인을 사랑하고 간 향토사학가를 잃었다는 것도 애석한 일이지만 첫째는 나를 아는 지음이 이제 없게 되었다는 것도 슬픈 일이거니와 이제는 다시 용인에 선생의 뒤를 이을만한 애향인이 없을 것이라는 것도 하나의 손실이다.
회고 하건데 선생은 도대체 공명심이란 털끝 만큼도 없었던 이 시대 용인의 마지막 선비였다.
심지어 내가 문화상 수상을 추천해 드리려고 하자 “나를 속되게 하지 말라”고 일언지하로 거절 하셨던 분이다.
어떤 교수가 명성황후를 ‘민비’로 호칭하자 “지금이 일제시대인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따위 언사를 쓰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이처럼 선생은 민족사관이 남달리 투철하셨던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요즘같은 세상에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정치가는 정치적 입지를 위해, 어떤 사람은 입신양명의 발판으로 걸맞지 않는 ‘자리’나 탐하고 자기성취를 위해 온갖 술수를 다한다.
수전노는 더 벌기위해 혈안이 된 세상에 돈과 명예와 공명을 초개같이 여긴 사람이 있다면 바로 식송 박용익 선생이시다.
선생은 명문 거족인 고령 박씨의 후예이고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해공 신익희 선생이 외가가 된다.
평소 민족사관이 투철하였던 것도 해공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일찍이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한때는 서울에서 출판사를 경영하다가 “돈버는 일에는 취미가 없다” 낙향하여 초야에 묻혔다.
그러나 선생의 지적욕구는 억제할 수 없었고 그 욕구는 낙후된 향토문화 연구로 분출되어 선생의 이름 석자는 용인향토문화의 전형이며 대명사로 자리를 잡게되었다.
1982년 12월 12일, 열두명의 후학들을 모아서 ‘향토문화연구회’를 만들어 이 분야의 맹아기를 개척하는데 밑거름이 되셨던 분, 그래서 전국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향토문화 자료가 정립된 용인이 되기까지 문헌, 문화유적, 역사의 현장, 애국지사, 위인선열의 행적과 금석유문의 집대성 등 선생은 이를 위해 용인의 사면팔방 구석구석을 누볐다.
선생의 업적과 숨은 공로는 외지에서 학계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막상 곁에 있는 우리네 이웃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행적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심지어 사재를 털어 회의운영, 향토자료의 출판비용에 썼으며 이를 위해 자갈논을 팔았다.
이를 두고 주변에서는 정말 이 시대 이 고장에서는 ‘정신나간 사람’으로 펌하되기도 하였다.
선생은 정말 이시대 이 고장에서 할 일을 하신 분이지만.
덜렁 남긴 유산은 애장서 몇 백권, 향토문화 연구자료 그리고 원고지 몇장이 전부일게다.
그러나 선생이 남긴 정신적 자산은 값으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고 선생이 탐구한 사료와 향토문화의 연구는 선생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고장의 역사, 문화,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가치를 구명하는데 있어서 용인이 필요로 하는 자료이며 연구였다.
아! 무엇을 위대하다고 말하겠는가?
선생의 삶은 무상의 댓가와 바꾸었지만 그 결실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니 이것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또 무엇을 애국이다 말하겠는가? 내 나라 내 민족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내 고향의 풀 한포기, 돌조각 하나, 돌에 새겨진 글씨 한자, 선생은 그 모두를 품에 안으려 하였으니 恣痼?애국의 발로였던 것이다.
선생은 고독했다. 70이 넘은 노구, 그와 같은 세대들에게는 통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향토인의 독보적 존재 였음에도 항상 후생이 가외라는 말로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한마디로 선생은 용인 역사의 한 획이며 증인이었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기인 정도로 여겨졌을 뿐이다.
감히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에 견줄 수는 없지만 어쨌든 선생은 지음이기는 하였으나 나는 족탈불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