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의 교육(敎育)은 본래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나오는 글. 즉 득천하지영재이교육지(得天下之英才而敎育之)라는 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다시말하면, “천하의 영특한 인재를 얻어서 가르치고 길러서 장차 쓸모 있는 일꾼을 만든다”라는데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오늘 날 흔히 쓰는 ‘영재교육’이란 것도 이 구절이 축약된 용어란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교(敎)는 가르치는 것을 뜻하나 본래는 ‘모방하다’‘흉내내다’라는 뜻이었다고 하지만, 교육의 실제가 대부분 모방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또 육(育)은 양(養)을 뜻하는 것으로서, 양은 먹이고 보호하고 자라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교육은 가르치며 모방케하고 윗사람을 본받게 하며 심신을 보호하고 길러주는 것이란 뜻이 되는데 이에는 피동성이 강하게 내재되고 있음이 전제된다.
교육이 피동성을 갖는다는 것에는 서양에서도 다를 바 없다. 교육이란 뜻으로 번역되는 영어의 에쥬케이션(education)도 본래 라틴어의 어쥬케어(educare)에서 유래된 용어로서 이는 ‘이끌어 내다’ ‘끄집어 내다’는 뜻이고 또 독일에서는 교육의 개념을 ‘끌어 올린다’는 뜻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하니 피동적으로 이끌려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다만 어의적 해석으로 볼 때, 동양에서는 길러주고 보호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서양에서는 단순히 ‘끌어내고 밀어올리고’ 라는 점에서 동서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느경우에서든 사람을 태어난 채 놔두지 않고 목표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보다 인간답게 뜻있게 값지게 살아가는 바탕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인위적 노력을 가중시키는 과정이 교육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피동성이 배제된 교육이 있다면 이에 가까운 용어로서 배움(學)이란 것이 있다. 스스로 교육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 ‘독교육’이라 하지 않고 ‘독학’이라고 하는 것을 본다면 이에서 능동성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어쨌거나 교육이란 용어는 백번을 강조해도 해로울 것이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이것인데 교육은 가정교육에서 출발하여 학교교육, 사회교육 등 평생을 교육과 배움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듣자니 ‘용인교육발전협의회’가 창립되었다고 하고 어디서 창립을 알리는 프랭카드를 본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