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섭씨 집 뒤에서 대단위 야철지(지금의 제철소)가 발견됐고 풍무골쪽에서 도요지가 발견됐으며 완장리 대지골에서도 분청사기, 옹기 가마터 등이 발견되고 있다.
또 형진농원 하단부에 기와 가마터와 조리봉 뒤쪽에서 옹기 가마터가 찾아지고 있다. 조선 세종대왕 때 세종지리지에는 감바위 밑과 요산골에 도기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매랭이 뒷골에는 대단위 건물터와 고급스런 도자기 파편들이 대량 발견됐다. 당재가 있었던 곳이 아니면 사찰이나 권위주의적인 사람이 살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매랭이의 뜻을 음미해보면 매는 곱고 좋은 흙을 말하며 랭이는 이랑 고랑을 뜻해 고운흙이 많이 나는 곳이 매랭이가 된다.
그밖에도 원암 1, 2리에 분청사기터가 있고, 전궁리에 통일신라 토기 가마터와 도장골의 자기산포지, 창리 선돌부근의 자기 산포지 및 기와 산포지, 화곡 마을회관 뒷산쪽으로 백자 산포지, 연안궁 자기 산포지 등 아직까지 매장된 채 있는 유적이 우리 남사면에는 무수히 많다. 남사면 북쪽끝에서 남쪽 끝인 원암리까지의 유물 내지는 유적지를 살펴보자. 우선 남사면 완장리 대지골의 옹기터와 분청사기 도요지를 살펴보면 분청사기의 질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며 서민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갑발 도지미 등이 많이 흩어져 있고 시기는 15~16세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마를 살펴보면 7~8m의 너구리 가마다. 지금은 공씨네 묘소가 자리잡고 있으며 바로 옆에 옹기가마를 살펴보면 이것 역시 7~8m 정도의 가마 형태를 띄고 있다. 천주교 박해시 교인들이 숨어들어와 옹기를 굽고 팔아서 생계를 꾸렸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상당기간 생산을 했으며 일제시대부터는 이 사람들이 숯을 구워 수원장이나 오산장으로 팔러다녔다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15세기경부터 분청사기를 만들다가 옹기가마로 변형됐을 가능성이 있으나 실제로 옹기터와 분청사기 가마터는 분리돼 있다. 쌍으로 이뤄져 분청과 옹기를 따로 생산햇을 것이다.
이곳에 마르지 않는 샘과 집터가 남아있으며 부자터가 있었다는 말이 전해오는 것을 보면 분청사기와 옹기의 주인이 큰 부자가 아닌가 싶다. 그릇과 항아리의 상거래로 부를 축적했을 것이다. 다음은 형진농원 하단부 기와 가마터다. 매능동에서 보면 중동다리쪽으로 서북쪽 모서리다. 이곳은 70년대 농지정리 전에 야산으로 이뤄졌었다. 그곳에는 마르지 않는 샘과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박윤성씨 5대조께서 주인이라 한다. 1대를 30년을 계산하면 150년전까지는 조선기와를 생산했다고 볼 수 있고 지금도 무수히 많은 기와 파편과 불에 그을린 흙을 많이 볼 수 있다.
120~150년경에는 완장리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일제시대 행정구역을 만들면서 완전할 완자글 써서 완장리라 했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무엇이라 했을까. 기와를 굽는 사람을 와쟁이라 한다. 와쟁이가 많이 산다고 해서 와쟁이를 완장리라 했을 가능성이 크다. 웃 완쟁이 아래완쟁이라고 옛부터 전해온다. 뒷골 장진호씨 집 뒤에는 대단위 건물터가 3곳이 있다. 창리 선돌 부근에 기와파편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건물이 있었다.
봉명산은 일명 투구봉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불을 피우면 수원 어느산에선가 연기가 나온다 했다. 봉화인지 자연땅굴이 연결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밖에 여러 자료는 답사중이거나 찾아볼 예정이다. <배상일/ 용인시청 상하수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