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뜬 구림이 청산위에 흐르듯 역사는 멈추지 않는다.
이제 한세기를 마감하는 종점에 이르러 지난 백년의 풍운속에 깃들여진 내고장 용인의 영욕과 인걸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했다.
500년 조선왕조의 사직이 저물어가는 시기에 20세기를 맞이하는 첫해인 1900년 기흥읍 농서리 용주골에서 노작 홍사용이 출생했다. 태어난지 100일만에 서울로 이사했지만 후에 자라서 1920년대 낭만주의 운동에 섰던 시인으로 48세의 일생동안 시문학사적 거목으로 자취를 남겼다.
그로부터 광무 8년인 1904년 일제의 식민지 획책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이르러 수여선 철도부설 공사가 착공되었는바 같은 해 8월20일 용인에서 농민 400여명이 궐기하여 항의시위를 벌였다.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면서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고 노동인력의 강제 징발에 격분하여 일어났던 용인사상 최대의 궐기였지만 그 근본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민족의식의 발로였다고 보여진다.
광무 8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어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영국 주재 서리공사 이한응은 한국 정부의 국제적 지위의 격하에 분개하여 “퓐?모두가 노예가 되니 살아본댔자 치욕만 심해질 것이니 한번 죽어버림이 낫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1905년 5월12일 자결하여 순국의 선봉에 섰는데, 이분은 전주이씨로 이동면에서 출생했다.
1910년 한일 합방이후 1914년 4월1일 일제가 대대적인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양지군을 폐지해 용인군으로 통합한 것도 향토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본다.
해방후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이 빚어졌는데 동년 7월3일 북한군 제2사단이 김량장리를 침공했으며 이듬해인 1951년 1월27일 터키군이 김량장 151고지와 174고지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여 적 474명 사살, 23명을 생포한 전과가 있었다.
3년여간의 전투상황과 국란속에서도 향토애를 진작시키자는 취지아래 1952년 10월 용인애향가가 제정됐다. 지금 불리워지고 있는 애향가는 전란의 와중에서 돋아난 애향의 싹으로써 당시 유인상 군수가 착안했고, 유달영 선생이 작사하였으며 조승저가 곡을 붙혔다.
1960년대에 이르러 국가 대동맥인 고속도로 건설사업이 착수됐다. 1968년 2월1일 연지동 톨게이트에서 착공식 발파음이 터진 날로부터 11개월만인 1968년 12월21일 신갈인터체인지에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참석 개통테이프를 끊었다.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용인군의 발전이 가속화되었다는 점도 향토사적으로 빼 놓을 수 없는 일이다.
광릉숲에서 크낙새가 살아진 직후 1972년 2월28일 이와 맞먹는 희귀종 까막딱다구리가 포곡면 가실리 백련암에서 발견되고 우리나라 최초로 학계에 보고되어 같은 해 5월 천연기념물 제242호로 지정 됐다.
용인과 신갈의 도시기반이 구축된 것은 1980년대 초. 1981년 1월에 용인읍 도시구획정리 사업이 착수되어 오늘의 용인시 수부지역의 골격을 이룰 수 있는 밑그림이 됐다. 같은 해 6월11일에는 용인읍 별학동 구획정리 사업 작업중 선조대왕 손자 탐릉군의 묘에서 300년된 미라와 수의가 다량 출토되었고 수의는 단국대학에 기증됐다.
80년대 중반 경제성장의 바탕이 중진국 수준에 진입했을 무렵 향토문화에 대한 관심이 용인에서도 일기 시작했다. 가장 상징적인 것으로서 1986년 6월14일 실시된 제1회 용구문화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용인의 역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향토문화 연구가 활발히 전개됐다. 80년대 중반은 시대를 역행하는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전두환이 유신악법 호헌을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천명하자 1987년 8월29일 인기독교 연합회 신도 500여명이 용인장로교에 모여 전두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김량장 시가지에서 촛불 침묵시위를 전개 하므로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종교인들의 양심을 밝혔다.
같은 해 8월29일 희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오대양 사건’으로 남사면 북리 소재 주식회사 오대양 공장 식당 천장에서 32명의 남녀가 집단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이는 건국이래 최대의 집단자살 사건으로써 남자 4명 여자 28명이었다. 생존자나 목격자 증인이 될 만한 물증이 없었으므로 이 사건은 희대의 수수께끼로 미궁에 빠져버렸다.
1989년 1월22일 작은 낭보가 있었다. 용인국민학교 박영규 여자 어린이가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전국 국민학교 빙상경기 연맹권에서 1000미터를 2분2초19의 기록을 세워 1위를 차지했던 것. 1990년대 들어와서 용인사상 최대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1991년 9월21일 500㎖ 가까운 폭우가 당시 용인군 전역을 강타해 32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했으며 이재민 만도 515세대에 1802명이 발생했다.
재산피해로는 주택 1282동 파손, 농경지 유실 및 매몰 1421㏊, 소규모 시설 774개소, 하천 82개소, 산사태 300여개소, 수리시설 52개소 붕괴, 도로 22개소, 축사 120동 등 이었으며 피해액은 340억 6000만원으로 당시 화폐가치로는 천문학적 수치였으며, 복구비만도 494억7000만원이 투입된 엄청난 재앙이었다.
본격적인 위성시대의 개방을 알리는 무궁화위성 지구국 관제소 기공식이 1993년 2월3일 용인읍 운학리에서 실시됐다. 이 날의 행사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참석했으며 대통령 임기 만료 3주전으로 대통령 임기 최후의 기공식이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1993년 5월7일 자연농원에서 이지윤이라는 5세 가량의 어린이가 풍차 놀이기구를 타다가 풍차 틈새로 빠졌으나 창틀에 턱이 걸려 30미터 높이의 허공에 매달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하마터면 귀한 생명을 잃을 뻔한 아찔한 사고였으나 후에 안겨준 안도감은 휴먼 드라마였다. 1993년은 용인에 보물 사태가 났다. 동년 11월2일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심대호성공신교서 남은 분재기. 유수 초상. 오명항 초상. 분무공신교서 등 4종 7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건국이래 용인 최대로 문화유산이 빛을 발했다. 광복 50주년을 맞이했던 1995년 8월15일 김량장리 통일공원에 독립항쟁기념탑이 제막됐다. 용인출신 의병 40명, 독립지사 40명과 3.1만세 항쟁시위에 가담 희생되었던 371명의 애국지사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조형탑을 제막했다.
이에 때를 맞추어 외사면을 백암면으로 내사면을 양지면으로 개칭하여 일제 잔재를 비로서 청산하였다.
1996년 6월21일 기흥읍 상갈리에 경기도 박물관이 개관됐다. 이의 개관은 기전문화권의 정립과 중앙에 예속되었던 문화권에서의 독립이라는 의미가 있고, 용인에 경기문화의 진수가 집적되어 있다는 사실은 용인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본다.
1990년 중반부터 풀뿌리 민주주의 , 또는 지방자치제가 본격 실현되어 시장 군수를 직선제로 선출했다. 2기 민선시장으로 윤병희 후보가 재선되어 1998년 7월1일 취임했으나 일주일도 안돼 특가법 위반으로 전격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지난 8월 옥중사퇴를 했고, 99년 9월9일 보궐선거를 통해 새정치 국민회의 예강환 후보가 당선됐다.
용인시는 2000년을 목전에 앞두고 이젠 더 이상 과거의 농촌마을이 아니다. 90년대 초를 전후해 개발붐이 일기 시작한 용인은 불과 10여년만에 기흥, 수지, 구성지역이 신도시화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도시기반시설이 없는 무분별한 택지개발로 인한 폐해는 아직도 끊나지 않았다. 용인시는 이젠 수堅퓽?중핵도시로 급부상하면서 용인도시기본계획안을 상급기관에 상정한 상태이며 향후 10년이 지나면 인구 100만을 육박하는 거대 신흥 도시로 성장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