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혁신을 위해 왕의 각성을 촉구한 추탄 오윤겸선생

  • 등록 2007.03.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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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13대손·서울시장)을 비롯 현달한 후손들 많아
名家를 찾아|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가(海州吳氏 楸灘公派宗家)

   
 
글·홍순석(강남대 교수,용인향토문화연구회장) | 사진·서정표(편집장)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사거리에서 모현면 능평리를 잇는 43번 도로변은 문화유적이 많이 산재해 있다.
특히 대지고개를 넘어서 언덕길을 넘어서면 오산리(吳山里)라는 마을입구에 다다른다. 이곳이 해주오씨(海州吳氏)가 370여 년 간 지켜온 터전이다.

오산리 본동마을에 들어서면 해주오씨 추탄공파(楸灘公派)의 종가(宗家)와 재실인 유덕재(維德齋)가 있다. 재실 뒤엔 사당이 있다.

재실을 지나 왼편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오씨 시조인 오인유(吳仁裕)의 사적비와 15기의 단비(壇碑)가 좌우로 배열해 있다. 오른편으로 마을을 끼고 돌면 추탄공파문중의 세장지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오윤겸의 묘역을 중심으로 좌우 산기슭에 부친 희문(希文) 조부 경민(景閔), 아들 달천(達天), 손자 도종(道宗) 도융(道隆), 증손 수량(遂良)의 묘가 위치해 있다. 다른 성씨의 묘는 전혀 없다는 것이 이 지역의 특징이다.

# 오산리(吳山里)는 해주오씨의 종산(宗山)에서 연유한 지명
‘경기도지’에 의하면 해주오씨들이 용인지역에 정착한 시기는 560여년 전이다.
8세손인 희보(希保, 1360~1426)가 벼슬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처음 정착한 곳은 원삼면 지역이다. 희보 이후 후손들이 원삼면 죽능리와 목신리 그리고 학일리 일대에 세거하였고, 일부는 모현면 오산리 일대로 이거하여 동족촌을 형성하였다. 해주오씨가 모현면 오산리에 터를 잡게 된 것은 13세손 희문(希文)이 이석형(李石亨)선생의 현손인 이정수(李廷秀)의 사위가 되고 처가와 가까운 오산리로 들어온 이후부터이다. 실제 오산리에 거주하며 동족촌을 형성하게 된 것은 추찬공의 현손인 오명구(吳命久:1718-1798)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희문의 아들인 오윤겸(吳允謙)을 파조로 하는 추탄공파(楸灘公派)를 이루게 되는데 추탄공파는 해주오씨가문의 주요한 문파중 하나이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줄줄이 현달하여 명문거족을 이루게 된다. 특히 당시 모현의 지배적인 가문은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그리고 의령남씨 추담 오달제(秋潭 吳達濟)는 낙천 남구만(藥泉 南九萬)의 고모부가 되는데 지속적으로 통혼하면서 용인지역에서 유력한 가문을 형성하였다.

오산리라는 지명도 오씨의 종중산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실제로 능원리 오산리 일대에서는 오씨네 종중산을 ‘吳山’, 영일정씨네 종중산을 ‘鄭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추탄공 윤겸은 관찰사와 좌부승지,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낸 뒤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조카 달제(達濟)는 병자척화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윤겸의 손자 도일(道一)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숙종 때 도승지와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현손 명항(命恒)은 병조판서와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시대후기에 당쟁이 격화되면서 주로 소론계열에 속하였던 오산리의 해주오씨들은 더 이상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였다. 추탄 오윤겸(1559∼1636)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선조 15년(1582)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철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다.

광해군 9년(1617)에는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는데,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정상화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위하였고, 이어 우의정·좌우정을 거쳐 인조 6년(1628)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때 여러 정치 분쟁을 중재하였으며, 정치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 전념을 촉구하였다.

# 370여년의 전통을 계승해온 추탄공파의 종가와 유물
추탄공 문중의 집성촌이었던 오산리 본동 마을은 지금은 전원주택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20여 가구였던 집성촌이 현재는 6가구만 남아 있을 뿐이며, 재실과 종가, 묘역만이 남 아서 지난날의 화려했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해주오씨 추탄공파의 자긍심은 선조들의 명성은 물론, 후손들의 남다른 숭조정신(崇祖精神)에 있다.
추탄공파의 종가는 370여년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오산리에 현존하고 있으며, 선조들의 유적(遺蹟)을 온전하게 보관해 오고 있다. 보물 1096호인 <쇄미록> <서파집> 등 전적류가 12건이나 되며, 다양한 고문서가 전하고 있어 조선시대 사료로써 중시되고 있다. 고문헌자료는 23대종손 오문환이 보관해오다가 최근에 한국중앙연구원에서 본격적으로 조사하여 MF로 제작한 바 있으며, 장서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후손들 가운데 대료적인 인물로는 서울시장 오세훈(13대손)을 비롯하여 세정(서울대 자연과학장), 영환(추탄공파종친회장), 동근(해주오씨대동종친회 회장), 세영(미GM 연구실장), 승환(정신과 의사), 경자(연세대학교 여학생 처장), 세종(장기신용은행 행장), 문자(유아심리학 박사, 계명대 교수), 진모(前 초대 강원도 개발원장), 도근(前 보건사회부 약정 국장), 국근(동국대 교수), 세동(용인 수지구청장), 세형(분당 정자중학교 교장), 국환(前 경기 개발공사 사장), 세승(前 성남시 부시장)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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