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선생을 배출한 가마실 나주정씨(羅州丁氏) 가문

  • 등록 2007.05.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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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名家를 찾아| 가마실 나주정씨(羅州丁氏)
17세 언유(彦瑜)…용인지역 나주정씨 입향조
가마실 나주 정씨의 자랑…‘일실삼효’의 정려

   
 
다산 정약용(丁若鏞)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다산선생이 용인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다산선생은 포곡면 전대리 가마실에 집성촌을 형성하였던 나주정씨 동원공파(東園公派)의 후예이다.
에버랜드가 있어 잘 알려진 포곡면 전대리 입구에서 포곡초등학교를 끼고 돌아서 직진하면 가마실에 다다른다.
가마실은 본래 나주정씨의 집성촌이었다. 마을 어귀에는 1999년도에 용인시 향토유적 제47호로 지정된 정윤복(丁胤福), 정호선(丁好善)의 신도비각이 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바로 나주정씨 문중에서 배출한 효자, 효부비각이 있다. 이어서 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한 복판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10월 초에 행해지는 나주정씨시제에는 반드시 은행을 올리는 전통이 있는데, 문중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마을의 왼쪽에는 재실인 영모재(永慕齋)와 동원사(東園祠)라는 편액이 걸린 사당이 있다. 뒤에는 정윤복(丁胤福), 정호선(丁好善), 정호관(丁好寬), 정호약(丁好約)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재실과 묘소사이에는 전나무가 있는데 줄기가 꼿꼿하고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잘 생긴 모습이 마치 선생의 씩씩하고 웅혼한 기상을 보는 듯하다. 용인시의 홍보자료에 등장하는 시(市)나무 사진이 바로 이 나무를 찍은 것이라고 한다.

부자가 호성공신으로 추대된 가마실 나주정씨 가문
가마실에 나주정씨가 정착하게 된 계기는 대사헌공 정윤복(丁胤福;1544-1592)과 동원공 정호선(丁好善;1571-1633)의 묘역을 조성하면서 부터이다.

정윤복은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좌찬성을 지낸 응두(應斗)의 아들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대사성, 도승지,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선조대왕이 의주로 몽진(蒙塵)할 때 세자의 분조(分朝)가 있던 이천(伊川)으로 가서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호종하러 가던 중에 가산(嘉山)에서 병사했다. 선조 38년(1605)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의 작호를 받았다. 처음에는 백천(白川)에 장사하였다가 1615년에 가마실로 이장하였다.

대사헌공의 넷째 아들인 정호선(丁好善)의 묘역도 같은 곳에 조성되었는데, 이로써 나주정씨가 가마실에 정착하는 터전을 잡은 것이다. 정호선은 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 하였고 지평, 정언, 수찬, 응교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병을 칭하고 고향에 은거 하였다. 인조반정이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안변부사가 되었으며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파수대장이 되어 죽령으로 나갔다가 강화(講和)가 이루어지자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였다.

사후 조정에서는 호성청난원종공신(扈聖淸亂原從功臣)의 훈작을 내리고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다시 인조 26년(1648)에는 영의정으로 증직하였다.

동원공 정호선은 언유(彦瑜) 언원(彦瑗) 언벽(彦璧) 언상 4형제를 두었는데, 17세인 이들 때부터 가마실에 정착하여 살았던 것 같다. 17세 언유가 용인지역 나주정씨의 입향조라 할 수 있다. 그후 동원공의 후손들은 가마실에 세거성씨를 이루며 인근의 다른 가문과 혼척을 이루며 가세를 확장하였다.

가마실 나주정씨는 가문의 번창과 함께 가마실 인근지역인 영문리, 마성리, 금어리, 고림리 등지로 분산하여 가계를 형성하였다. 가마실에 정착한 나주정씨 동원공 후손들은 1970년까지만 해도 20여호가 되었는데, 지금 4호만 남아 있다.

가마실 나주정씨 가문의 자랑인 일실삼효(一室三孝)
가마실 나주 정씨의 자랑으로 여겨오는 일실삼효의 정려는 고종 신미년(1871) 10월에 명정(命旌)의 은전을 받은 정재위(丁載渭), 정의현(丁義顯) 부자 및 의현의 아내 해주오씨(海州吳氏) 효부정려이다.

효자 정재위는 동원공의 7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부친의 간병을 위해 얼음을 깨고 맨살로 들어가 고기를 잡았으며, 심산에 들어 약초를 캐는 등 자신의 구차함을 돌보지 않았다.

부친이 별세 하자 3년간 시묘하고 아침저녁으로 곡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의현 역시 부친의 효행을 본받아 유년시절부터 효행이 뛰어났다. 아내인 해주오씨도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를 섬겼다.

효자 정재위와 아들 부부의 효행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은 조정에 정려의 은전을 상소하였다. 고종은 이들에게 효자, 효부 정문을 내리고, 동몽교관과 영인(令人)으로 각각 증직하였다.

다산 정약용선생을 배출한 나주정씨 동원공파 가문
나주정씨는 원래 압해(押海)를 근거지로 활약한 호족(豪族)으로, 시조 정윤종(丁允宗) 이래 6세 공일(公逸)에 이르기까지 압해에서 살았다. 압해는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한 작은 섬 지방인데, 조선 태종 때 나주로 통합되었다.
이때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삼은 것이다. 7세 원보(元甫)에 이르러 덕수(德水)로 옮겨 살았으며, 9세 안경(安景) 때 배천(白川)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부터 제2의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가문의 성세에 힘입어 한양을 중심으로 경기지방에 세거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용인지역의 나주정씨들은 대개가 동원공(東園公) 정호선(丁好善)의 후손들이다.

그런만큼 가마실은 용인지역 나주정씨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용인이나 포곡, 모현 등 인근에선 나주 정씨보다는 가마실 정씨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동원공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셋째 아들인 언벽(彦璧)의 직계후손 가운데서 다산 정약용이 배출되었다.

현재 이 가문에서 배출된 후손으로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로는 정민섭(종친회장), 태영(종손)을 비롯하여 왕진(삼성 차장), 흥진(공무원 국장), 탁진(교장), 창진(농협조합장), 해산(전 용인시 국장), 해린(삼성 차장), 해석(금융감독원), 해익(교장), 완식(삼성 이사) 등이 있다.

<글.홍순석(강남대 교수, 용인향토문화연구회장), 사진.김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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