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으로 사라진 협궤열차 수인선

  • 등록 2007.09.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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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뿌리를 찾아서 추억 속 수여선 기관사 김완배(68) 씨
“삶의 애환과 낭만이 있었지”

   
 
<글/유성민 객원기자>

오늘도 버스나 지하철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무표정하다. 삶이 고단해서일까.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아는 사이이거나 길을 물어보는 정도, 방과 후 학생들의 통학길에서 왁자지껄한 수다가 쏟아질 때 정도다. 무뚝뚝하거나 때로 시끌벅적한 대중교통 이용자들에겐 다들 한량없을 이야기가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 그 속내를 나누지 않는 것이 요즘 세태다.
수원과 여주를 오가던 수여선 기차가 1973년 폐선될 때까지 수여선 열차는 지금의 대중교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이용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기차에 분위기가 따로 있을게 있나 생각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좁다란 공간이며 기차에서 뽑아내는 소리며, 덜컹거리는 움직임 같은 ‘불편함’ 속에도 이용객들이 이뤄내는 화음이 있었다고 말한다면 답이 될까.

# 협궤노선은 수여선과 수인선 밖에 없어
일제 치하였던 1930년 일본이 이천과 여주의 쌀을 수송하기 위해 선로의 폭이 일반 철로 넓이인 1m 43.5cm의 절반인 76.2cm 폭으로 설치한 협궤노선인 수여선은 1937년 개통된 수인선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발 역할을 해왔다. 수인선이 1995년 폐쇄된데 비해 수여선은 1972년 폐선돼 용인, 여주, 이천, 수원을 오가던 사람들에겐 더 일찌감치 아련한 추억이 됐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자가 신문사에서 만난 김완배(68) 씨는 수여선을 몰았던 기관사다. 1966년 입사해 전기공으로 일하다가 1969년부터 승무생활을 시작, 1998년까지 수여선을 비롯해 각종 기차를 몰았다고 한다. 승무생활을 시작하던 1969년부터 수여선과 수인선을 순번에 따라 몰았다는 김 씨는 건장한 체구와 활달한 웃음을 지으며 수여선에 대한 기억들을 들려주었다.
“협궤열차는 당시에 수여선과 수인선 이렇게 둘 밖에 없었어요. 일본인들이 쌀과 소금 등을 수원과 인천을 통해 바다로 빼가려고 만들어진 거라 화물수송이 목적이었죠. 나중엔 화물은 화물칸에 넣고 승객이 타는 칸을 따로 두었지만. 지금 전동차 있죠? 서로 마주보고 앉게 돼있는 거. 그렇게 돼있는데 마루의자에 통로가 아주 좁았죠. 큰 화물은 화물칸에 따로 표를 끊어 싣도록 했지만 웬만한 보따리나 큰 대야 같은 짐을 가지고 탄 사람들이 많아서 승객 칸은 짐 때문에 비좁았어요.”
수여선을 이용하던 사람들은 수원과 용인, 이천, 여주 등을 오가는 학생들과 직장인들,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벽 6시에 첫 차가 운행해 2시간 간격으로 오후 6시 반까지 운행을 했다고 한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여수와 이천 등지에서 곡식을 싣고 양지나 제일, 용인, 수원으로 가 다른 물건으로 바꿔오거나 팔기도 했고, 인천에서 생선을 실어와 수원을 거쳐 용인과 이천, 여주에 내려서 물건을 팔고 다시 곡식을 받아 인천에서 팔기도 했다. 새우젓, 생선, 잡곡, 깨, 수박, 참외 등이 당시 거래되던 주요 품목들이었다.

# 통학·통근에 우편배달-화물 수송 역할까지
“인천에 반짝 시장이라고 있었어요. 여주와 이천의 곡류는 인기가 많았지요.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에는 물건을 받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내려다 놓기가 무섭게 실어가곤 했으니까. 또 인천에서 생선을 실어다 파는 사람들도 나름의 규율이 있었어요. 이천장이나 용인장, 양지나 제일 등 각각 자기 구역이 있어서 항상 내리는 역이 정해져 있었고 다른 사람이 파는 장소에함부로 내려 장사를 하지 않더라구요.”
화물칸에는 신혼부부들이 수원역으로 부치는 살림이나 시멘트, 우편물 등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이야 우체국 차량이 따로 있지만 예전에는 일반 기차로 우편물을 실어야 했기 때문에 우체국도 단골이었다. 수원역으로 옮겨놓으면 전국 어느 곳으로든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들 수여선으로 짐을 날랐다. 기관실 뒤에는 화물칸 두 세 칸이, 그리고 그 뒤에는 객차가 2칸 정도 연결되곤 했는데 객차와 화물칸을 함께 실은 ‘혼합열차’는 주로 새벽에 많이 다니고 여객만 싣는 두 칸짜리 ‘동차’는 낮에 다니곤 했다.
“맨날 타는 사람들이 타니까 승무원이나 승객이 서로 가족사를 다 알았죠. 저 집엔 애들이 몇 명이고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도 알았으니까요. 어느 때는 기차가 중간에 고장이 나서 한참 고치고 있으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에서 밥이랑 국이랑 가져다주기도 했어요. 참 인심이 좋았죠.”
협궤열차는 좁은 선로 폭 때문에 많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정에서 메주고개(현재 멱조현 고개)까지 이어지는 언덕길이 가장 힘든 코스였다. 두 칸짜리 동차는 처음에는 조개탄을 연로로 가다가 나중에는 디젤 기관차로 바뀌고 별 문제가 없었지만 혼합열차는 증기기관차여서 언덕을 오르기 전에 불을 잘 때서 증기를 잘 모아두어야 언덕을 무사히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잘못 하면 가다가 서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어떤 승객은 객차 안에서 무거운 대야를 머리에 지고 “짐을 내려놓으면 기차가 힘들어할 것 같다”고 지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니 우습기 보다는 당시의 어려운 기차운행 상황을 짐작 할만한 일이다.

# 기차를 승객들이 밀기도
“1970년쯤이던가요.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저 메주 고개에 터널이 막히고 차가 들러붙어서 사람들이 내려서 기차를 밀어준 적도 있었어요. 언덕에서는 사람들이 내렸다가 언덕 올라가면 타기도 했고요.”
예전에 언덕에서는 승객들이 버스를 밀어주어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기차도 밀어주는 일이 있었다니 요즘 사람으로는 상상이 어렵다. 그래도 어려운 고비에선 승객과 승무원이 하나가 돼 도왔다는 얘기는 참 정겹다.
거의 매일 이용하는 이들 외에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도 많았다. 수학여행지로 인기가 높았던 곳은 벽절(현 신륵사)과 세종대왕릉이 있는 여주지역이었다. 수원과 용인 등에서도 수학여행지인 여주로 가자면 꼭 수여선을 타야만했다.
“수여선을 타고 다니던 학생들 가운데에는 나이가 들어서 직장을 잡고서도 또 수여선으로 통근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여름방학에 수인선, 수여선 타고 다니는 학생들을 위한 운동회를 열어주기도 했지요. 공무원들도 나오고 지역 인사들도 참여해서 운동회를 보고 그랬어요.”
수여선 기차는 얼마나 빨리 달렸을까.
“수원에서 여수까지 노선이 73.4㎞인데 한 세 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동차는 그보다 좀 나았지만 혼합열차가 그랬어요. 혼합열차는 중간 중간 역에서 화물칸의 짐을 내려야 하는데다가 용인역과 양지역에선 물을 다시 채워야 했으니까요. 수원이나 여주에서 물을 채우고 출발해도 증기 기관차니까 금새 물을 사용하니 용인역과 양지역에는 물을 꼭 채워야 했어요. 거긴 물 담당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장사를 해서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낸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수여선 열차가 폐선될 때는 이용객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며 우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1972년 수여선이 폐선된 후 경부선 같은 일반 궤선의 전기열차를 몰았고 1998년 퇴임까지 열차를 운전했다. 용인 버드실에서 나고 자라서 철도 일을 하면서는 수원으로 이사해 살았지만 그는 퇴직 후에는 고향인 용인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다. 증기기관차, 디젤기관차, 전기기관차를 다 몰아보고 철도의 시대 변화를 지켜봤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 철도사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차가 다니던 길을 지나면 옛 생각이 든다는 그는 기차가 레일 이음새를 지날 때 나는 따각따각 하는 소리, 기적소리, 당시 기차에서 보던 풍광들이 기억난다고.

# 관광열차로 남겼더라면 하는 아쉬움 남아
“참 낭만적이었지요. 수여선을 폐선시키지 않고 그냥 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요. 그게 제일 아쉽지요. 노선이 얼마나 좋아요. 신갈에 민속촌, 박물관 있지, 제일리 계곡도 좋잖아요. 이천에 온천도 있지, 도자기 축제도 있고요. 여주의 신륵사며 세종대왕릉이며 쭈욱 이어져 있잖아요. 순전히 관광 명소로만 다니는 거죠. 내 생각엔 한번 이런 노선을 살려보는 걸 검토할 필요도 있다고 봐요. 그렇게 살려놓고 여주에서 원주까지 광궤를 뽑아놓으면 정말 좋을텐데.”
인천시는 옛 수인선의 한 역인 소래 등록문화재로 지정 요청했다고 한다. 또, 남동구는 소래역사박물관 건립도 검토해 관광명소로 탈바꿈할 계획이다. 수인선은 1990년대 초까지 이용됐다는 점에서 수여선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옛 것이 너무나 빨리 사라지는 시대풍조가 아쉬워졌다.
용인신문 기자 webmaster@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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