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국충정의 귀감으로 손꼽히는 명가(名家)

  • 등록 2007.10.01 00:00:00
크게보기

고려말 입향…원삼면의 대표적인 세거성씨
기 획 | 名家를 찾아 | 해주오씨 호군공파(海州吳氏 護軍公派)

   
 
해주오씨(海州吳氏)는 고려 말에 원삼면 지역에 입향한 이래 주로 학일리와 죽릉리 일대에서 세거해 왔으며 원삼일대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을 유지해온 가문이다.
해주오씨들이 원삼면지역에서 터를 잡기 시작한 때는 8세손인 오희보(吳希保; 1360~1426)로부터 유래한다.

희보는 고려 말에 용양시위사(龍侍衛司左領護軍)를 지냈으며, 말년에 원삼면 일대에 정착하여 많은 후손을 남겼다. 희보 이후에 해주오씨 후손들이 원삼면 죽능리를 중심으로 목신리, 학일리 등지에 세거하였다.

이들이 바로 해주오씨 호군공파 후손들이다. 이들 후손은 더욱 번창하여 13세손인 희문(希文)에 이르러서는 모현의 처가 쪽으로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오산리 일대에 세거하면서 동족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지』의 기록에 의하면 해주오씨들이 원삼지역에 세거하게 된 시기는 550여 년 전이며, 160여 세대의 후손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급속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상당수의 후손들이 타지로 이거한 상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200여호에 600여명이 거주하고 있어 가문의 성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해주오씨의 성세를 말해주는 선현들의 묘역
원삼면 일대에는 도처에 해주오씨 호군공파 선현들의 묘역이 산재해 있다. 특히 죽릉리 능말마을, 산소골, 어현마을 뒷산에 집중되어 있으며, 학일리와 목신리 일대에 널리 산재한다.

이들 가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죽릉리 능말에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 오인수 의병장 기적비와 보령재(保寧齋) 표석이 있다. 보령재로 들어가는 입구와 보령재 위쪽에 오옥정(吳玉貞), 오경안(吳景顔), 오도철(吳道徹), 오복정(吳福貞), 오중로(吳重老), 오세공(吳世恭), 오계선(吳繼善), 등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어현마을 위에는 승죽고개로 돌아가는 능선위에 오경순(吳景醇), 오달존(吳達尊), 오윤충(吳允忠), 오일영(吳一泳), 오달효(吳達孝), 오명복(吳命復), 오성묵(吳成默), 등의 묘소가 일렬로 자리 잡고 있다. 또 승죽고개 옆에는 입향조(入鄕祖)인 오희보(吳希保)와 원평서씨(原平徐氏)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해주오씨 호군공파에서는 선조들의 묘역이 많아서 시제(時祭)를 모시는 일이 여간 고충이 아니다. 오민근 종친회 고문에 의하면, 3일 동안 시제를 지내도 다 지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충 때문에 10여 년 전부터 음력 10월 초하루에 재실인 보령재에서 시제를 지낸다.

또한, 9개 종파가 합동으로 시제를 모시고 있다. 합동으로 제례를 모시는 9개 종파는 신녕공(新寧公), 추탄공(秋灘公), 서하공(西河公), 학생공(學生公), 처사공(處士公), 판서공(判書公), 통사랑공(通事郞公), 만운공(晩雲公), 월곡공(月谷公) 파이다.

우국충정의 얼을 계승해온 해주오씨 사람들
해주오씨 호군공파의 인물을 정리해 보면, 타 문중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우국충정의 공 적을 남긴 분들이 많다. 해주오씨의 시조인 현보(賢輔)는 고려 고종 때 거란군을 물리친 공로로 해주군(海州君)에 봉해졌다.

이후 조선시대 3학사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오달제(吳達濟)는 15세손이다. 오학사는 원삼면 출생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론의 주모자였다는 이유로 심양에 끌려가 절개와 충성심을 고집하다 처형당하였다.

오달제가 심양에서 처형당하자 기이하게도 그가 태어난 원삼면 학일리 마을에는 모든 풀들이 말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지금도 마을 이름을 고초골이라 부른다.
근대시기에 한 집안에서 3대가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서서 온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오인수 (吳寅秀), 오광선(吳光鮮), 오희영(吳姬英), 오희옥(吳姬玉)도 이 집안사람들이다.
오인수는 원삼면 출신의 의병장으로 1905년(광무 9년)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용인ㆍ안성ㆍ죽산ㆍ여주 등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의 아들 광선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 1대장을 시발로 해방될 때 까지 독립투쟁을 계속했으며, 손녀 희영과 희옥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항일 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오의선(吳義鮮)도 동경에서 발발한 2ㆍ8독립선언에 적극 가담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오만영(吳萬泳)은 목신리 구봉말 사람으로 교육을 통하여 젊은 동량을 길러 국권 회복을 하는데 일조 하겠다는 신념을 관철했던 인물이다.이러한 해주오씨 가문의 우국충정의 정신은 현대 시기에도 이어졌다. 오형근(吳衡根)은 6.25전쟁 시 각종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장성으로 야전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오남영(吳南泳)은 1970년 월남전에서 무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 월남동성훈장 등을 수상한 장성이다.

해주오씨 호군공파의 후손들 가운데는 각계 각층의 저명한 인사가 많다. 이 명문가의 후손 중에서 25세인 민근(敏根)은 해주오씨대종회부회장과 해주오씨호군공파 회장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진출한 후손으로는 외교관으로서 대사를 역임한 학겸(學謙), 육사교장을 역임한 남영(南泳)이 있으며, 면장을 역임한 후손으로는 항선(恒善), 준영(峻泳), 훈근(薰根) 등 3명이나 되고, 시의원으로 용근(溶根) 등이 있다.
재계에 진출한 후손으로 규원(圭遠)이 동부그룹부회장 및 산업은행이사를 역임하였고, 진영(振泳)이 농협장을 역임하였다. 또 학계에서는 두영(斗泳)이 농협대교수를 역임하고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미숙 기자 kiss1204h@yonginnews.com
Copyright @2009 용인신문사 Corp.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용인신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지삼로 590번길(CMC빌딩 307호)
사업자등록번호 : 135-81-21348 | 등록일자 : 1992년 12월 3일
발행인/편집인 : 김종경 | 대표전화 : 031-336-3133 | 팩스 : 031-336-3132
등록번호:경기,아51360 | 등록연월일:2016년 2월 12일 | 제호:용인신문
청소년보호책임자:박기현 | ISSN : 2636-0152
Copyright ⓒ 2009 용인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onginnews@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