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자태로 그리움 삭이는 꽃

  • 등록 2007.10.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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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대감집 담장에 피던 대감꽃 또는 양반꽃
박 시영의 들꽃 이야기 / 능소화

   
 
<글·사단법인 한국들꽃문화원 원장 박시영>


# 임금님을 기다리는 그리움
옛날 어느 한적한 시골에 꽃과, 새와, 사슴만이 지내는 곳에 소하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풀 한포기를 친구로 삼고 자연적으로 산하를 돌아 댕길 때, 소하는 그곳을 지나는 임금님의 행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행차를 이끄는 나리의 눈에 또 하나의 자연을 발견하고는 임금님 앞에 내세웠습니다.

소녀의 천진스런 자연스러움이 두려움으로 심장을 쥐어박았습니다. 무너지는 듯한 심장을 잘 달래여 임금님 앞으로 나아가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만인의 대표인 임금님도 그렇게 돋보이는 모습을 지금껏 본 기억이 없었던 것 이었습니다. 때마침 바람을 타고 온 순수한 소녀의 냄새에 임금님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 나갔습니다. 봉긋한 소녀의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신비의 신선함, 익어 오른 자태의 복숭아색 고운 살결, 우주의 탄생을 알리려 하는 듯한 수줍으면서도 초롱초롱한 까만 눈, 하늘을 안고 있는 소녀의 자태에 임금님은 한눈에 반해 신하를 시켜 그를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남쪽으로 공무집행차 행차를 하니 돌아갈 때 데려가도록 하겠노라 하시며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듯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돌아섰습니다. 임금님의 손끝에는 자연과 사람의 향이 깊도록 배여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소하는 임금님을 기다렸습니다. 마음씨 착한 소하는 나물도 하러 갈 줄 모르고 담장 밑에서 임금님의 행차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오직 임금님만 있었습니다. 봄의 아지랑이 속에도 임금님은 있었지만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임금님은 보이지만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여름철의 보슬비 속에도 임금님은 웃고 계셨지만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낙엽은 굴러 가슴팍으로 세차게 달려들건만, 달려오건만,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임금님은 계셨지만 만져지지는 않았습니다. 차가움의 하얀 솜털 눈은 소하의 마음마저 시리게 만들고 겨울은 깊어만 가고 이내 임금님의 생각조차 흐려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소하의 하염없는 세월은 담장 너머로 소하의 눈물만큼이나 흘러 가 버렸습니다.

소하의 마음이 구름 되어 흩날려 산을 넘어 강을 건너도 임금님은 어이 계시는지 만나지를 못하는 신세의 시간이 가슴을 홀랑 졸였습니다. 기다림의 여름날, 소하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기대 할 것이 없었습니다. 졸아버린 까만 가슴을 쓸어내리는 운명의 시간도 차쯤 아주 가깝게만 와있었습니다. 담장 밑에서 상사병의 마음으로 임금님의 이름을 부르다 부르다가 자연을 닮은 소하는 이내 눈을 감았습니다.

# 처녀의 순수한 아름다움 간직
더위가 턱에 차오르는 이때에, 다음해 비가 오고, 또 더위가 턱에 닥아 와 차오를 이때 즈음 담 밑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피어오르고 있으니, 소녀여 슬퍼마오. 넝쿨을 올려 보내 제일 높은 데에로 아주 높은 꼭대기로 올라가, 올라 갈 수 있는데 까지 올라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피고 지는 꽃이 있으니, 소녀여 울지 마오, 소하여 진정해요. 우리 모두 당신을 능소화라 부를 테니.

처녀꽃 금동화 양반꽃 대감꽃 절꽃 다 의미를 함축한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소하, 그 때문인지 상민들이 함부로 이곳을 집안에 심어 키우다 발각되면, 혼쭐이 났다는 애기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대감꽃 또는 양반꽃이라 불렀는데 그래서인지 옛날 대감집 울타리에 많이 심었었다 하기도합니다. 탐스러움의 여유입니다.

초여름서부터 가을까지 지치지 않고 무더기로 탐스럽게 피는 이 꽃은 처녀꽃 금동화라 하기도 합니다. 능소, 밤을 능가한다는 뜻으로 소하의 한창 무르익은 소녀 시절의 자태를 어둠의 밤조차 방해하지 못하고 늘 아름답게 빛을 낸다하여 능소화란 말도 있습니다. 그 고운 꽃불로, 적막의 어둠을, 그리운 임을 향해 마음 사르는 밤의 여인 있으니, 소하, 이젠 능소화라 말해 주리오. 능소화는 다른 꽃과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능소화는 한참 절정의 아름다운 소녀시절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로 져 버려서인지 꼭 닮아 있습니다. 그 싱싱한 젊은 시절을 일찍 마감해서인지 꽃조차도 한참 아름다움을 잔뜩 간직한 채로 서둘러 그대로 미련 없이 떨어져 져 버리지요. 땅바닥에는 수없는 소하의 아련함이 벌겋게 흩어져 바람에 나뒹굴고 장맛비에 저항하고 있지요.
다른 꽃들은 시들해져 관상 가치가 없을 때 떨어져 버리는데 능소화의 꽃만은 한참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을 때 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서둘러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로 떨어지고 말지요.

에구, 슬픈 소하여, 에구, 가련한 소녀여, 그 이름 능소화라. 소녀시절의 한을 품고 떨어진 자신의 과거를 재연하는 듯 싶습니다.
용인신문 기자 webmaster@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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