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면 송전을 빛낸 3세 효정의 명가(名家)

  • 등록 2007.1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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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여 년 전 입향…20세~22세(진혁, 사량, 운해) 효행 귀감
기 획 |名家를 찾아함종어씨 양숙공파(咸從魚氏 襄肅公派)

   
 
# 희성임에도 불구하고 명현을 많이 배출한 함종어씨
함종어씨의 시조는 어화인(魚化仁)이다. 중국 섬서성 풍익에 거주하며 벼슬하다가 난을 피해 고려 명종 25년(1195)에 강릉(江陵)으로 왔다.

이후 거처를 함종(평안남도 강서군)으로 옮겨 정착하였다가 고려에 귀화하였다. 이후 6세까지 함종에 거주면서 현달하여 가문을 일으키고, 함종을 관향으로 삼았다.
함종어씨는 희귀 성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명현들이 배출된 가문이다.

어씨는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24명을 배출하였는데, 주로 함종어씨에서 많?인물이 나왔다. 함종어씨의 대표적 인물은 세종 때의 명신으로 집현전 대제학에 이른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노모(老母)를 봉양한 변갑(變甲)이다.

그의 아들 효첨(孝瞻)은 조선 전기의 거유(巨儒)로서 명망이 높았으며, 효첨의 두 아들 세겸(世謙)과 세공(世恭)도 모두 이름을 떨쳤다. 세겸은 세조~연산군대에 걸쳐 각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양관대제학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세공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성종 때 호 ·병 ·형 ·공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세공의 9대손 유봉(有鳳)은 함종어씨가 낳은 대표적 학자이며, 유봉의 아우 유구(有龜)는 경종의 국구이다.
그의 4촌아우 유룡(有龍)은 영조 때 대사간 ·중추부지사를 지냈으며, 유구의 아들 석정(錫定)은 정조 때 도승지 ·도총관을 거쳐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밖에도 선조 때 화가 몽룡(夢龍)은 매화 그림에 뛰어나 황집중(黃執中)의 포도 그림, 이정(李霆)의 대(竹) 그림과 더불어 3절(三絶)로 불리었고, 영담(泳潭)은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옥포(玉浦)·노량(露梁) 해전 등에 전공을 세웠으며, 재연(在淵)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한말의 개화파인 윤중(允中)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을 지내며 개화혁신정책을 추진했는데,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향으로 가다가 난민에 의해 죽었다.

# 460여 년 전에 입향하여 명가를 이룬 양숙공파 후손들
함종어씨는 시조로부터 13대손에서 13개의 파로 나뉘었다. 지파에서도 가장 번창한 가문이 세공(世恭)을 중시조로 모시는 양숙공파(襄肅公派)이다. 본래 양숙공파의 본향은 고양시 성석동 하당촌이다.

함종부원군 효첨(孝瞻)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좌의정을 지낸 세겸(世謙)이다. 동생인 세공(世恭)은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 분이 바로 양숙공이다. 양숙공의 대를 이어 14세 맹순(孟淳), 15세 숙평(叔平), 16세 계옥(季玉)으로 이어진다.

용인시 이동면 송전리 안호현에 처음으로 정착한 입향조는 바로 아성군의 증손인 계옥(季玉)이다.
이 분이 어떠한 연유로 송전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이후 460여년 15대를 면면히 이어오면서 양숙공파 후손들은 이동면 송전리에서 대표적인 성씨로 자리 잡았다.

# 3대에 걸쳐 효행을 실천하여 정려의 은전을 받다
한 지역에서, 한 가문에서 3대에 걸쳐 충절과 효행을 행하여 정려의 은전을 받은 사례는 흔치 않다.

정려 하나만으로 가문의 자랑으로 여겨오는데, 함종어씨 양숙공파에서는 20세 진혁(震赫), 21세 사량(史良), 22세 운해(運海)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충절과 효행을 행하여 효행의 귀감이 되었다.

21세 진혁은 어려서는 노모를 극진히 모셨다. 노모가 병환이 깊었을 때 겨울철에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니, 용지천에 가서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원하였다.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얼음이 갈라지고 잉어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이를 가져다가 노모에게 드리니 병환이 쾌차하였다. 마을에 흉년이 들어 곤궁할 때는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자신의 재물을 털어 도왔다.

22세 사량은 진혁의 아들이다. 8세에 가업을 이어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할 때마다 정성으로 시묘(侍墓)하니, 온 마을 사람들도 감동하였다.
23세 운해는 부친의 등창을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으며, 모친의 배설물을 맛보아 봉양하였다. 이 역시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감탄하였다.

3대에 걸친 효행은 온 마을에 널리 알려져 칭송이 자자했고, 급기야는 용인지역의 유림들이 적극 조정에 천거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암행어사 홍종운을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고 예조에 보고하였다. 철종8년(1857년)에 비로소 3세의 효행에 대한 정려의 은전이 베풀어졌다.

# 선조의 효행을 계승하며 실천하는 양숙공파 후손들
이동면 송전리 안호현에는 함종어씨 재실인 숙경재(肅敬齋)가 있으며, 효정각, 효정비, 세장비가 한 곳에 정비되어 있다. 세장비는 함종어씨 양숙공파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옆의 효정기는 3세의 효행담을 기록한 석비이며, 그 옆에는 정려각이 있다. 정려각 안에는 정려현판과 효정기를 새긴 석비와 액자가 걸려 있다.
여기에 용인유림이 예조에 올린 상계와 정려의 은전을 명하기까지의 내용이 담겨있다.

재실 경내에 들어서면 정려각과 효정기를 새긴 석비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양숙공 후손들이 3대에 걸친 효행에 대해 얼마나 자긍심이 큰가를 알 수 있다.

재실 뒤편으로는 지명(智明)과 그의 아들 진문(震汶) 진동(震東) 진혁(震赫), 손자 사량(史良)의 묘소가 있다. 재실에서 좀 떨어진 소약사 산기슭에는 입향조 계옥(季玉)의 묘소를 비롯해서 6기의 묘소가 잘 정비되어 있다. 석비나 묘소의 치장에서 다른 문중의 묘역에서 느낄 수 없는 정성이 깃들어 있는데, 이 역시 선조들의 효행심이 계승된 것 같다.

이동면 송전리 함종어씨 종친회를 이끌어 가는 회장 연우(淵愚)씨, 총무 현우(賢愚)씨, 그리고 종친회의 대소사를 자문하는 윤정(允貞), 윤조(允祖)씨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 가문에서 배출한 인물 가운데 태우, 윤석씨는 군인으로, 성룡, 명담씨는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윤빈, 윤항, 운우, 준선씨 등은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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