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탈, 명쾌 그리고 솔선의 리더십

  • 등록 2007.1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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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씨 좋은 아저씨 같은 매력…섬김의 원천
그만의 리더십 농촌교회…성공의 방향제시
Cover Story | 덕성교회 서달웅 목사

   
 
“신앙은 한마디로 말해서 타자를 위한 삶, 남을 돕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덕성교회 서달웅(48) 담임목사는 평소 움직임이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교회에 출근하는 날이 많다. 바쁜 와중에도 동네를 돌며 재활용 물건을 분리수거하거나, 장수촌인 이동면 덕성리 동네 어르신들의 힘든 일을 돕기 위해서다.
소탈하고 명쾌한 서달웅 목사. 그는 동네 주민의 90% 이상을 덕성교회 성도로 이끈 강력한 리더십의 주인공.
시간을 아끼고 몸을 돌보지 않는 실천과 작은 일도 소중히 여기며 남을 돕는 일에 솔선하는 모습은 그가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리더십과 섬김의 원천이다.

#덕성교회
동네 주민 거의 다를 한 교회의 열성 성도로 만들 수 있을까. 아무리 작은 농촌 마을이어도 쉽지 않은 일이고, 믿기지 않는 일이다. 농촌교회의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덕성교회.
서달웅 목사가 덕성교회에 부임한 것은 1992년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용인 덕성교회는 63년 전통의 유서 깊은 교회이지만 서 목사 부임 당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시련기에 놓여 있었다. 새벽예배는 다섯명, 낮 예배는 칠십명 정도 출석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 목사 부임 후 새 목사 구경하러 갔던 동네 주민들이 곧바로 교회에 신자로 등록했고, 몇주 후 부터는 주일예배 때 서로 좋은 자리에 앉겠다고 일찍 올 정도로 교회가 붐비기 시작했다.
“말씀과 기도로 미래를 창조하며 선교하는 교회를 지향합니다.”
그는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가 됨을 강조하며 예배 중심의 건강한 목회에 정성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곧 기존의 교회는 비좁게 됐고, 날로 늘어나는 성도들로 인해 드디어 1998년 새성전터 3636㎡를 구입하고, 2000년에 새성전을 건축했다. 마침내 그해 12월 31일 첫 입당예배를 드리는 감격을 맛보게 됐다.
“마을 방송시 찬송가가 먼저 흘러나오는 동네는 우리 말고는 없을 겁니다.”
분당 수원 등 인근 지역의 교회로 나가는 성도들까지 합하면 95% 정도가 교인인 마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5%정도는 이주가 잦은 주민이라고 할 때 덕성리 원주민 100%가 덕성교회의 성도라 할 수 있다. 놀라운 일이다.

#권위는 섬김에서 나오는 것
그는 자칭 절약, 재활용 정신을 무장 시키는 강사.
서 목사는 생활 속에서 전등 하나, 물 하나 아끼는데 빈틈이 없다.
서목사로 인해 덕성교회 교인들 모두 쓰레기는 버릴 것만 버리고 물세 전기세를 아끼는 생활이 몸에 뱄다.
“국내며 세계 할 것 없이 도울 곳이 너무 많습니다.” “절약의 위력은 너무 셉니다.”
물세 전기세를 아낀 돈으로 농촌교회와 해외 선교 활동을 돕는다. 이는 곧 주님의 은총을 이웃에게 베푸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받은 강사료도 해외 선교지에 교회를 짓는 등 봉사하는 일에 사용한다. 그는 다 쓴 볼펜의 용수철은 쇠로, 껍질은 프라스틱으로 분리해서 버릴 정도로 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쏟는다고 재미있게 설명한다.
그가 동네 전체를 덕성교회 성도로 만든 원천에는 이 같은 모범적인 삶과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열린 마음이 일조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교인이 아닌 사람도 그의 진실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자리에서 감화된다. 그래서 그의 절약 실천은 곧 전도라고 할 수 있다.
서 목사는 자신의 교회뿐만 아니라 부흥회 강사로 나서는 여타 교회에서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윗옷을 벗어 던지고 쓰레기통을 뒤엎어 분리수거를 실천해 모범을 보인다.
“권위는 폼 잡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는 “권위는 섬김에서 나오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의 섬김은 작은 일상부터 주의 섬김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오롯하게 주님을 향하고 있으며 그런 서 목사를 교인들은 깊이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초등학교 1학년에 목사의 길 정해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이미 성직자의 길을 정했다. 그가 태어난 진안 하평 마을은 100%가 크리스찬이었으며, 그 역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기독교 환경 속에서 자랐다. 어쩌면 덕성리 마을, 덕성교회의 사례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고향 마을의 실현인지도 모른다.
그의 부친은 교회의 정신적 지도자였고, 21세 위인 형님은 초교파적으로 다 알려진 유명한 부흥사 서달수 목사였다.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형님이 목회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그는 초교 1학년 때 이미 산속에서 설교 연습을 하면서 목회를 준비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이 길을 가야함을 여러 번 가르쳐줬습니다. 제가 기도하면 목회의 길을 가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성직자를 보며 “저렇게 참된 일은 없을 거다”고 생각했다. 사역은 남을 섬기고 희망을 주고 봉사를 하는 일이라는 가치관이 뚜렷했다.

#독립
늦둥이다보니 부모의 사랑 속에서 나약함을 고민해야 했다.
“이 세상에서 참 약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찌 큰 일을 할까 고민했지요.”
결국 그는 1976년 중학교를 마친 후 곧바로 집을 뛰쳐나왔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고학하면서 “목회는 섬김이고 못할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견뎠다.
새벽에 신문을 돌리면서 한줌의 쌀로 연명하던 때도 있었다.
수입이 너무 적어 일일공부 장학교실 배달 일로 바꿨다.
그런데 그 일을 맡자마자 너무 잘돼 수백명의 배달원 가운데 확장에서 1, 2등을 했다. 성실하니 맡기만 하면 확장이 된 것이고 보수도 그만큼 늘어났다.
“사람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장이 고교 졸업한 후에도 계속 해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다.
서 목사는 신학대 진학을 1년 미룬 채, 딱 1년만 하기로 약속하고 지사장이 됐다. 하도 돈이 잘 벌려서 한달에 100만원 정도의 수입이 생겼다. 집 한 채씩 사들일 수 있는 돈이었다.
그렇지만 “기도 않고, 성경 안보고 가면 여지없이 고객이 떨어졌어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라고 회상한다.
서 목사는 신학대 진학을 미룰 당시 “신학대 4년간 생활할 의식주 비용과 학비, 대학원까지 공부할 돈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고도 남을 정도로 돈을 벌게 해 주었다. 그러나 시련이 닥쳐 검은 손의 협박에 결국 사업권을 빼앗겼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1년 만이었다. 다시한번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느꼈다.
때마침 부산 둘째 형님 곁으로 내려가게 됐는데 형의 소개로 만난 사업가에게 자신이 벌었던 돈 전체를 빌려주게 됐다. 그러나 회사가 크게 부도가 나면서 돈을 몽땅 날렸다. 식구들은 그가 자살이라도 할까 걱정이 됐지만 막상 서목사 자신은 담담하고 불평도 없고 견딜만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목사를 시키려고 체험시킨 것이구나. 훈련시키는 거구나”였다.
그때 몸이 완전히 제로 상태였는데, 불 일듯이 목회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일었다.

#신학대 진학
그는 “주의 길을 가겠다”고 회개하고 기도생활을 많이 했다. 기도 중 신학대를 합격할 것이라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공부에서 손을 놓은 지 오래됐지만 합격한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주위 사람들한테 합격할 것이라고 미리 선포했다. 모두들 믿지 않았지만 1984년 그는 한 번에 강남대학교 신학과에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들은 서목사는 학교 기둥을 붙잡고 울었다. 그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해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훌륭한 종이 되겠다, 기뻐하는 종이 되겠다 맹세했어요.”
학부를 마친 그는 한신대학원에 입학했고, 1991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의 길
신학교 2학년때 서 목사는 목사인 형의 소개로 용인교회에서 학생회 교육전도사로 봉사했다. 학생회가 크게 부흥했는데, 기쁨의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용인 남사면에 있는 중복동교회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성령의 감동이 되었는지 교회 없애라는 소리를 들으면 막 눈물이 났습니다. 남사는 안 된다고 다들 말리고, 못 가게 하니 스스로 찾아갔습니다.”
개척하는 심정으로 담임교역자로 부임하기로 마음 먹었다. 잠잘 곳조차 없는 극도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네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한달만에 28명으로 늘었다. “제가 성격이 급해요. 하나님이 성격대로 역사를 하시는거죠.”
그는 굶어가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능력이 전능하니 도와주시면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속 길을 열어주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걸 느꼈어요.”
89년에는 결혼도 했다.
“사역의 길은 목숨을 내놓는 길입니다. 사모가 목숨을 던질 사람이어야 하니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부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현재의 사모를 만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사모를 보는 순간 편안하고, 시원하고, 기뻤습니다.”
만난 후 곧 결혼을 했다. 현재의 김진숙 사모(46)는 수지에 있는 남서울비전교회 최요한 담임목사의 부인인 김미숙 사모와 자매간이다.
잠시 서목사 집안을 소개해자면 5대째 기독교를 믿고 있으며 4남2녀 형제 모두 목회자 또는 교회와 관련된 직업에 종사한다. 처갓집 또한 4남매중 3남매가 목회를 하고 있다.
5년 동안 70호 마을에 100명의 신자를 만든 서목사.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때 성령이 불타오르고 분당에서 교회를 개척해 보고자 하는 원대한 꿈이 일면서 일을 진행했다. 그러나 도중에 덕성교회에서 목회 청빙이 왔다.
“개척에 뜻이 있어 갈 수 없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개척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덕성교회로 보내셨습니다. 덕성교회 부임은 하나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해외 선교와 작은 교회 살리기 운동
“선교는 하나님 계심을 느끼게 해주는 겁니다. 그들은 울고 땅을 치면서 새 사람이 됩니다.”
서 목사는 해외 선교에 열정적이다. 태국, 필리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지역에서 주로 선교활동을 한다. 그는 필피핀 마닐라의 사라이포라이라는 마을에 사재를 들여 올해 ‘열방의 빛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100명의 신학생이 신학교육을 한다. 이들이 목사님이 되고 열악한 환경에 놓인 주민들을 구원하게 되는 것이다.
“태국에서 300명 집회를 해보면 불교 신자도 옵니다. 20명 정도가 태국목사님이 되고 전도를 다니는 간증 강사가 됩니다.”
서목사는 국제 사랑의 선교회 총무 활동을 통해 교회 100개, 병원 10개를 세웠다.
이와함께 한국 작은교회 살리기 운동본부의 이사 겸 주 강사로 활동하면서, 특히 농어촌 교회를 돕는 사역에 몰두하고 있기도 하다.
# 나라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와
“목사님들이 어떤 사상을 가졌느냐가 중요하다”는 서 목사는 나라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구국 기도를 많이 한다. 외채를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그는 근면 절약 성실을 강조한다. 성실은 믿음이고 진실이며 충성이다. 그는 한국도 세계를 도와 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 존재 가치를 말로 표현을 못합니다. 목회 하면서부터 잠이 없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클 뿐만 아니라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서 목사.
“교회가 교회 될 때 민족이 살고, 목사가 목사 되면 다 삽니다.”
교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서 목사의 확신에 찬 음성은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박숙현 기자 europa@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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