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19세기 말, 일본은 탈아 입구(脫亞入歐)를 주장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내세운 논리는 일본의 청년층을 자극했다. 청년들 중에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다. 아시아가 아닌 유럽을 지향한 일본은 결국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여기에 분연히 맞선 인물이 안중근 의사였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주장한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척살했다. 청년 안중근은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대한제국의 정치인들은 ‘진사 사절단’을 꾸려서 일본에 사죄하러 떠났고,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 강경파들을 자극했다(?). 즉각적인 한국 병합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일진회 회원들은 ‘합방 청원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80년대 일본의 총리이며, 우익의 대표적인 사람이 나카소네 야스히로이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일진회장 이용구였다. 안중근의 이토 척살이 한국병합을 앞당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일본의 한국 강탈 ‘시점’은 로드맵에 의해 진행된 것뿐이다.
굴복(屈伏), ‘엎드리고 무릎을 꿇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굴복 시킨다.”는 것은 최상이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라는 것은 애당초 없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것도 ‘백번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위태롭지 않다는 것’이다. 《손자병법》에 나오므로 이의를 제기하려면 2500년 전 춘추시대 손무에게 하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 있을까. 당연하게 설정된 현재의 전선(戰線)을 해체시키면 싸울 일이 없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변환시키면 된다. 대체시키면 싸울 일이 없다. 싸워야 하는 대상을 끊임없이 전환시킨다. 전선을 새롭게 구축(構築) 한다. 누가 먼저, 어떤 전선을 만드느냐. 기존의 틀을 뒤집고, 다르게 생각하면 길이 보인다. 내가 상대해야 할 진짜가 누구인지, 발상의 전환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자. 그런 후에 매복을 하든지, 엎드리든지….
1885년,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는다. 갑신정변 시에 양국 군대의 충돌 문제와 조선에 대한 권리를 협의했다. ‘청·일의 군대는 조선에서 철수하고, 유사시에는 서로 통보한 뒤 출병한다.’는 내용이 추가된다. 그로부터 9년 후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고종과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톈진조약에 근거하여 청의 통보를 받은 일본은 조선의 입장을 묻지도 않고 군대를 파견했다. 한반도에서 청·일 전쟁이 발발했고, 수십만의 농민군과 백성들이 살육됐다.
전쟁과 평화가 함께 붙어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사람들의 바람은 언제나 모호한 것인지, 모호한 단어만이 살아남은 것인지. 힘과 정의는 양립할 수 없는데 양립한다. 위 명제의 객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이 다른, 경쟁적 담론을 내포한 언어는 충돌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국가 안보에 관련된 합의에 대해 국가 간의 정의는 존재하기 어렵다. 안보는 본질적으로 국가 간 논란의 대상이다. 베스트팔렌조약(1648년) 이후 정해진 국가의 실체는 여전히 합의된 것으로 존재한다. 국가는 인구, 영토, 주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동의하거나, 말거나.
사족 하나, 일본 안에 한반도의 유사시를 원하는 자들이 얼마나 될까. 사족 둘, 한국 안에 한반도의 유사시를 바라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Copyright @2009 용인신문사 Corp.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