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스승의 그림자만 밟았을 뿐인데 이를 불경으로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스승은 하늘이라며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던 시대도 있었다. 더 먼 옛날에는 스승이 길을 가면 제자는 늘 한 발 짝에서 좀 더 물러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따르던 제자들도 있었다.
상고시대에 요 임금에게는 허유라는 스승이 있어 마음의 곧음을 가르쳤다. 허유에게는 설결이라는 스승이 있어 몸의 바름을 가르쳤고, 설결에게는 왕예라는 스승이 있어 어른의 말에 순종하는 바를 가르쳤다. 왕예에게는 피의라는 스승이 있어 남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도리를 가르쳤다하니 훗날 퇴계 이황 선생은 이러한 가르침을 일러 말하길 곧 공경의 가르침이라 했다. 이러한 공경의 가르침은 당대에서 끝난 게 아니라 후학의 가르침을 통해 이어지는데 율곡 이이 선생은 제자 사계 김장생을 가르치면서 스승의 가르침에 제자는 반드시 공으로 섬기고 경으로 순종하라고 했다 전한다. 그러므로 스승의 제자를 향한 가르침이라는 것은 사람됨의 가르침이요, 인성의 가르침이요, 성품의 바름을 향한 가르침이다. 요즘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먹고사는 실용의 문제와 거리가 멀다하여 뉘집 개가 짓냐는 식으로 외면시 당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런 스승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삶의 완전성을 위해 누구나 반드시 몸과 마음으로 배우고 익혀둬야 하는 덕목인 것이다.
가르침이 너무 실용으로만 간다면 목적을 위해서 안 할 짓도 못 할 짓도 없는 수악한 무도의 세상이 아니된다 누가 장담하랴. 세상에는 큰 죄에 해당되는 게 몇 개가 있다하는 데 그중 하나가 잘못 가르친 죄도 포함된다 한다.
춘추 책의 해설서인 춘추곡량전 제10편 소공 19년조 기록에 따르면 자녀가 8세가 되어 물과 불을 만나 화를 입었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죄가 맞고, 자녀가 10세가 되어 스승을 만나지 못해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죄가 맞다고 기록한다. 이어서 기록하길 공부하지 않으면 마음이 삐뚤어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사실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자기 수신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야 유효한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승의 가르침 속에는 소양인으로서의 사회적 질서를 지켜낼 책무가 담겨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게 변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당장의 생활에 물질적 이득을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일찍이 기독교에는 두 개의 경전이 양대산맥으로 존재하는 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그것이다. 구약경전의 가장 위대한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말이고, 신약경전의 가장 위대한 말은 예수가 인간에게 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말 중에 첫 마디가 창세기 3장에 있는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이다. 예수가 인간에게 하는 말 중 하나가 마태복음 11장에 있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이다. 두 개의 물음 속에는 ‘너는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느냐’ 라는 꾸짖음이 배어있다.
가르침을 잘못 배워 드러나는 행동에 대한 꾸짖음인 것이다. 짐승은 사람하고 달라서 별다른 가르침 없이도 어지간하면 본능으로 살아간다. 저들 세상에서는 생각이라는 것이 없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공자님의 말을 콧등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가 위태한 것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현자의 말에 관심도 없다. 그저 태어나서 어미로부터 생존에 대한 몇 개의 행동만 익히고 나면 그게 전부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저들 세상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사람이 사람다워짐의 첫 번째가 스승과의 만남이요, 가르침이다. 옛사람은 이러한 만남과 가르침의 시작을 8세로 보았고, 늦어도 그렇게 10년 공부를 마치고서야 사람 됨됨이 공부의 시작으로 본 것이어야 하는 시기이다. 제 속으로 난 부모도 못 가르치는 일을 생면부지의 남인 선생님이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그 공이 폄훼되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선생님이 맘껏 가르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는 더 높은 물질적 격려와 응원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