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당나라 때의 문장가 유종원의 ‘귀주의 당나귀’ 이야기 한 토막이다. 귀주 땅에는 본래 당나귀가 없었다. 혹자가 당나귀를 구해와 풀어놓으니 이를 처음 본 호랑이는 당나귀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그것을 짐승의 신으로 여겨 조심하고 경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는 호승심이 생겨 당나귀를 이리 툭 저리 툭 쳐보기도 했으나 당나귀는 그저 헛발질만 한 두 번 할 뿐 별반 시시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호랑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별거 아니잖아’ 그러고는 당나귀 목줄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배불리 잡아먹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글의 말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당나귀는 몸체가 큰 탓에 덕이 있는 듯했으며, 우는 소리는 우렁차서 기량이 높은 듯 했나니, 만약에 자신의 틈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호랑이는 감히 덤비지 못했으리라.
권력의 속성이라는 것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한번 밀리는 순간 그 명줄은 단번에 물어뜯길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것을 다시 되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국민은 앞서 박근혜 전직 대통령을 통해서 임기 중임에도 대통령으로서 직무가 시원찮을 때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음을 두 눈 똑똑히 뜬 채 지켜본 바 있다.
작금 대통령의 직에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 귀주의 당나귀와 생각에 교차가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허공을 향해 어퍼커트를 날리며 호기롭게 뭐라도 될 듯한 시늉이라도 했으나 대통령 임기 2년이 지난 지금 윤석열 대통령이 한 것이라고는 보도된 내용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되는데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격노하는 중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거부권으로 국민을 무시하는 게 전부라는 인식을 지우기가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대통령의 자리는 한가로이 술이나 마시며 얼굴 불과한 채로 몽롱하니 밤을 지새우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의 자리는 누군가에게 눈을 부라리며 목에 핏대 올린 채 소리나 지르는 자리는 더더욱 아니다. 대통령의 자리는 국회에서 통과된 민의를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법이 정한 거부권을 함부로 남발하는 자리가 아니다. 이러한 거부권에 대한 국민이 느끼는 감정은 국민 개개인은 비록 힘없고 나약한 게 맞지만, 같은 법을 두고 대통령과 그 일가친척과 측근들만 요리조리 빠져나간다면 그걸 애교로 봐줄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되랴.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금의 국민은 학습하는 중이다. 그저 숨만 쉬었을 뿐인데도 국민에게 민폐가 된다면 이건 여간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러하듯 국민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뭘 기대한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사실 그의 사법공무원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책임자인 대통령 된 데는 배우자 김건희 여사나 장모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벼락같은 하늘의 은총일 수가 있다. 그러나 늑대의 자유는 사슴에게는 죽음이 될 수도 있음이다. 물론 모두는 늑대이면서 사슴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삼는다마는 늑대에게 주어진 자유만큼, 사슴에게도 자유를 줘야 한다는 데 방점이 있는 거다.
이제 윤석열 대통령은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늦은 만큼은 할 수 있기에 내가 안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뭘 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냥 보이는 대로 믿고 살면 편해진다”라며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살면 된다지만 국민을 그렇게 비견될 수는 없는 일.
윤석열 대통령은 최소한 국민 모두에게는 배신당하지 않을 권리를, 대통령이기 때문에 배려해 줘야 한다. 2년의 임기를 지나오는 동안 행정착오부터 크고 작은 번복들을 많이 했다. 그중에 가장 큰 실수를 들라면 어쩌면 당신을 향해 한 표 행사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던 사람들을 후회하게 만든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