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핀 밤나무
홍재석
그대 귀가 있던 자리에 낙엽지는 걸 본다 그 낙엽 시들
지 않아 칼날같은 한철 끝나지 않는다 꽃 같은 그대의 귀
를 베고 간 칼날, 그 칼날 몸속에 흐르므로 그대는 지금
낙엽으로 붉게 젖은 자리를 지난다 식지 않은 낙엽을 밟
으며 그대는 그대를 꽃 피게 한 사랑을 미워한다 그대는
꽃이 났던 자리가 아프고 그 자리에 다시는 꽃눈 맺지 않
을 거라 생각한다 허나 그대는 스스로 비명을 듣지 못하
므로 아프지 않기로 한다 몸속에 흐르는 칼날이 소용돌이
치는 날, 피지 않는 꽃과 시들지 않는 낙엽 사이에서 그대
는 봄날처럼 미쳐버리고, 봄날은 찾아오지 않고, 그대의
절망 새싹처럼 깨어있다 뭇엇도 잠들지 않는 폐허, 같은
그대의 화원 그대는 거기서 푸른 새싹과 뜨거운 낙엽으로
나를 그린다 지금 나는 그대의 척추 같은 나무가 된다 그
러니 그대는 그대 사랑했던 자리마다 나를 세워두도록 한
다 그리고 시월의 밤나무가 그러하듯이 그대가 흘린 뜨거
운 낙엽 책임지지 않도록 한다 이듬해 봄이 다 오도록 굳
지 않고 맥박치는 낙엽이 있거든 나 또한 잠들지 않고 미
쳐버리면 된다 미쳐서 나의 가지는 스스로를 벨 칼날이
되고 그 베인 끝자락마다 아프다는 소리 듣도록 그대
귀 닮은 꽃 새하얗게 틔우면 된다
약력: 월간 문학세계. 좋은문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용인문학회 회원
한국 시인상 수상
광명 문학상 수상
계룡문학상 수상
‘시인의 정원’ 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