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진료소가 이용 건수가 줄고 도시화로 인해 병원이 늘어나면서 예산낭비라는 지적이 있지만, 여전히 농촌 주민들의 건강상담과 건강지킴이로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은 장평보건진료소 모습.
농촌 노인들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병원
당장 아프면 ‘보건진료소’ 노크가 일상
“문 닫는 다니” 성난 민심… 폐쇄 올스톱
시대 변화 맞춰 역할 재정립 발등에 불
용인신문 | 용인시 처인구 농촌 지역의 ‘건강 사랑방’ 역할을 해온 보건진료소가 폐쇄 기로에 섰다가 기사회생했다. 이용 건수 감소와 도시화에 따른 병원이 늘면서 보건진료소 기능 약화를 이유로 폐쇄가 검토됐지만,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존치가 결정된 것이다. 이번 결정은 공공의료의 가치를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효율성 문제와 변화하는 의료 환경 속에서 보건진료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존폐 갈림길에서 돌아온 보건진료소의 오늘과 내일을 현장의 목소리와 함께 깊이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 처인구 내 7곳 폐쇄 ‘전면 백지화’
용인시가 처인구 내 보건진료소 7곳(백암면의 장평, 가창, 백봉, 원삼면의 죽능, 양지면의 대대, 남사읍의 아곡, 원암)의 폐쇄 논의를 전면 백지화하고 정상 운영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수십 년간 진료소를 내집처럼 드나들던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처인구 일부 읍·면 지역은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30%를 넘어서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이들 지역에서 보건진료소는 단순 치료를 넘어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을 조기에 발견하고 관리하는 ‘1차 의료 안전망’ 역할을 수행하며, 더 큰 질병으로 악화하는 것을 막는 예방 의료의 첨병으로 기능해왔다. 실제로 이번 존치 결정 과정에서 주민들은 “단순히 환자 수가 적다는 경제 논리로 농촌 어르신들의 건강 기본권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특히 “진료소는 홀몸 어르신들의 안부를 묻고, 건강 정보를 나누며 마음의 병까지 치유하는 유일한 사랑방”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질병 치료 외에 주민들의 사회적 고립감을 해소하고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는 복합적 기능이 폐쇄를 막는 결정적인 여론을 형성했다는 분석이다.
■ 의사 없는 의료 취약지 ‘유일한 보루’
이번 존폐 논쟁은 올해 초, 일부 진료소장의 임기 만료와 정년퇴임 시점이 다가오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용인시는 하루 평균 이용자가 8명에 불과한 7개 진료소의 현황을 근거로, 소장이 공석이 되는 곳부터 단계적으로 폐쇄하고 순회 진료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인건비와 운영비 등 예산 낭비를 줄이고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기흥구에서는 1명의 인력이 고매, 공세 2곳의 진료소를 순회하며 운영 효율을 높이고 있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주민들이 체감하는 보건진료소의 가치는 단순한 효율성만으로 재단할 수 없다. 1981년 '농어촌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법'에 따라 문을 연 보건진료소는 의사가 없는 의료 취약지의 유일한 보루였다. 간호사, 조산사 등 자격을 갖춘 보건진료 전담공무원이 26주 이상의 직무교육을 이수한 후 진료소장으로 24시간 상주하며 가벼운 진료는 물론, 만성질환 관리, 건강 상담, 영양 개선 지도까지 도맡는 ‘마을 주치의’이자 ‘건강 사랑방’이었다.
특히 고령 인구가 대다수인 처인구 농촌 지역에서 진료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65세 이상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고혈압·당뇨약부터 파스, 소화제, 설사약, 감기약까지 무료로 받으며 건강을 챙긴다. 먼 병원까지 가는 수고로움 없이 문턱 낮은 곳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고, 정서적 위로까지 얻는 소중한 공간인 것이다.
■ 지역사회 거센 반발 ‘존치 U턴’
지난 4월, 백암면 장평·가창보건진료소 등의 폐쇄 검토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 사회는 거세게 들끓었다. 처인구 7개 보건진료소 운영협의회를 중심으로 주민 500명 이상이 서명한 청원서가 용인시에 제출됐다. 이들은 “보건진료소는 우리 마을의 든든한 건강지킴이”라며 “경제 논리로 주민의 건강권을 포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용인시는 결국 폐쇄 검토를 백지화했다. 이상일 시장 역시 주민들의 의료 공백 발생 가능성을 우려하며 신중한 판단을 주문했고, 처인구보건소는 운영협의회와 주민 의견을 적극 수렴해 정상화 방침을 확정했다.
■ 낮은 이용률 ‘예산 낭비’ 어쩌나
주민들의 환영 속에서 진료소는 유지됐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하루 평균 8명이라는 낮은 이용률은 예산 낭비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농촌 지역에도 병·의원이 늘고, 119 구급 시스템과 ‘천원택시’ 등으로 의료 접근성이 개선되면서 진료소의 존재 가치가 예전만 못하다는 현실적인 목소리도 여전하다. 대한의사협회 또한 의사가 아닌 인력의 진료 행위에 대한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다.
변화의 바람은 외부에서도 불어오고 있다. 오는 2027년, SK반도체클러스터가 들어서는 원삼면에는 백암, 원삼, 양지, 남사 등 남부권역을 아우르는 ‘남부통합보건지소’ 설치가 추진된다. 이는 농촌 지역 주민들에게 양질의 통합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작은 보건소 역할을 할 전망이다. 또한, 용인시가 내년부터 본격 시행할 ‘보건의료 돌봄 통합 서비스’의 방문 진료, 건강 관리 프로그램 등과 기존 보건진료소의 역할을 어떻게 차별화하고 연계할 것인지도 풀어야 할 숙제다.
이번 용인시의 결정은 공공의료의 가치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큰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단순히 소장을 새로 임명해 현상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보건진료소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번 결정이 보건진료소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용인시의 다음 행보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박숙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