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ㅣ이영재

  • 등록 2020.07.06 09: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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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

                    이영재

 

박주사가 와서 염치없이 비빈 밥을 잘도 퍼먹는다

땅을 달라고

가문 날이었다 노인네 주름마냥

푸성귀를 다듬는 척하다, 전등 가는 박주사의 뒤통수를 무쇠솥으로 후려쳤다

 

개가 짖었으면 해서

온 동네 개들이 연쇄하는 잎사귀와 다를 바 없이 시끄럽게 쏟아져댄다

 

이영재는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이번 시집은 그의 첫 시집이다. 시집 속의 그의 대부분의 시편들은 일반적인 문법을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문장은 모호한 언어와 모호한 이미지로 되어 있다. 그의 낯선 문장이 독자를 당혹하게 만드는 이유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오랫동안 자신이 시를 썼다고 생각해 왔는데 시가 그를 기록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의 시편들은 시에 의해 기록된, 그가 보고 생각한 것을 쓴다고 말한다. 시에 의해 구축된 그가 시를 구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반성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 것이다.

「기우」는 그나마 서사가 보이는 작품이어서 어렴풋이 시적상황을 짐작 할 수 있게 한다. ‘박주사’와 시적 화자는 혈육관계일 것이다. 땅을 달라고 조르는 것으로 보아 화자는 장손 집안의 자식일 것이다. 박주사가 전등을 갈아주는 것도 땅을 받아내기 위한 선행일 것이다.

전등을 갈아주고 있지 않았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화자는 땅을 달라는 박주사가 미웠을 것이고 울컥 화가 치밀어 무쇠솥으로 박주사의 뒤통수를 흐려쳤을 것이다

이 살인사건으로 온 동네의 개들이 시끄럽게 짖는 것으로 시는 끝난다. ‘개가 짖었으면 해서’는 예의 낯선 문장이다.

시인은 이 살인 사건을 기우, 가뭄을 극복하기 위한 기우제로 읽은 것이다. 창비 간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김윤배 기자 poet01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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