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용인시 광교산 자락에 살고 있는 소설가이자 아동문학가인 이상권 작가가 자연과학 분야의 식물에세이 ‘소년의 식물기’(별꽃)를 출간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용인시와 용인문화재단 공모 지원사업으로 발간된 ‘소년의 식물기’는 그간 무심히 지나쳤던 풀과 나무 앞에 멈춰서서 지구 생명력의 원천인 식물을 경배하게 만든다.
작가는 9세 무렵 소에게 풀을 먹이면서부터 시작된 식물에 대한 탁월한 관찰력과 해석력으로 마침내 한국판 파브르 식물기를 완성했다.
“아홉 살 소년은 어느 날 커다란 암소 한 마리를 책임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소가 좋아할 만한 풀들을 찾아다니며 숲에서 뒹굴었다. 우연히 파브르의 어린 시절을 그린 만화를 보고는 과학자가 되리라 포부를 다지지만…”
‘소년의 식물기’는 작가가 50여년 동안 파고든 식물기의 완결판이다. 마치 식물과 소통하는 듯 은밀한 생명 유지의 전략까지 폭로하는 작가의 과학적이고 인문학적인 해설은 최고의 식물 교과서다. 전체 416쪽 분량으로 작가의 딸인 단후와 작가가 그린 식물 그림이 함께 실려 있다.
작가는 수지구 고기동 광교산자락에 깃들어 살면서 마당에 난 잡초 하나 뽑지 않은 채 무성히 자라난 풀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집 마당은 식물의 광장이다. 잡초들 세상이다. 이웃들도 그런 마당을 보면서 한마디씩 흘린다. 잡초를 방관하는 거야 당신 마음이지만, 잡초가 이웃집 마당까지 번져서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그럴때마다 소년은 참으로 불편해진다. 그래도 풀비린내 가득한 마당을 보면, 저도 모르게 그곳에 누어 풀피리를 불고 싶다."
작가는 마당의 식물로 가족의 풍성한 채식주의 식탁을 차려내기도 한다.
작가는 식물의 깊은 속사정을 과학적 지식과 맛깔스런 스토리텔링을 덧붙여 재밌게 일러주는 덕에 독자들은 덩달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식물을 이해하는 환희를 누릴 수 있다.
‘소년의 식물기’는 모두 1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글과 함께 작가가 직접 그린 식물 그림 40컷과 그의 딸 이단후의 그림 136컷 등이 수록돼 자연과학적 지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동화적 감성까지 두루 선사한다.
작가는 이 책에 식물이란 자급자족하는 유일한 생명, 그러니까 가장 완벽한 존재라는 사실임을 깨달은 계기가 되는 사건과 이야기를 엄선해 담았다. 또 ‘머리 아홉 달린 괴물’같은 옛 이야기 뿐 아니라 작가가 어릴 때 직접 경험한 에피소드를 마치 동화처럼 ‘소년’의 이야기로 그려냈다. 작가는 영원한 목숨을 가진 ‘히드라’의 삶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는 파브르에 대한 오마주로 해석된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동물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를 되살리고 싶었던 여덟 살 아이로 돌아가 유한한 인간 생명에 대한 경험을 털어놓기도 한다. 꼬리가 잘려도 다시 자라는 도마뱀과 달리, 손가락이 잘려도 다시 자라지 않는 동네 형의 기억 역시 어린 소년의 가슴에 깊이 박혀 있다.
이러한 소년의 체험들은 식물의 어린 눈의 탄생부터 땅속에 단단한 터전을 일구는 뿌리, 나무의 몸으로서 중심을 잡는 줄기, 영양분을 비축하는 열매, 식물의 구조 및 변화 등의 과학적 원리와 함께 어우러져 소년의 기쁨과 고통, 설렘과 모험 같은 성장의 기록을 독자가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또 농촌마을의 숲과 들을 터전으로 살아간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등을 등장시켜 생명에 대한 지혜를 흥미롭게 전달한다.
“할아버지는 돌담 아래로 늘어진 불두화 줄기에다 큰 돌멩이를 눌러 놓았다. … 돌멩이가 눌린 곳에서 뿌리가 난단다.… 살그머니 돌멩이를 들어 보니까, 줄기 밑으로 뿌리가 보였다. 소년은 폴딱폴딱 뛰면서 춤을 추었다. …소년의 손으로 귀한 생명을 분가 시킨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불두화가 꽃을 피우자 가슴이 뭉클했다. 휘묻이란 가지를 휘어서 땅에 묻어 인위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다. ”
완벽한 존재란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식물처럼 타자를 존중하고 같이 살아가는 철학적인 힘을 가진 생명임을 일깨운다. 스쳐 지나가는 풀잎 한 자락에도 인간이 배워야 할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권오길 강원대 생명공학과 명예 교수는 추천사에서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 주변의 식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잊지 않는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소년의 바람이 책 읽는 이의 마음에 스며든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결코 쓰지 못할 한 편의 아름다운 식물기”라고 적었다.
지난 1994년 ‘창작과비평’에 소설을 발표한 후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펴낸 작가는 그동안 ‘풀꽃과 친구가 되었어요’ 등의 동화를 비롯해 청소년 소설 ‘시간 전달자’, ‘애벌레를 사랑한 애벌레’ , ‘들꽃의 살아가는 힘을 믿는다’ 등 생태 논픽션 등을 다수 출간했다. 그중 소설 ‘고양이가 기른 다람쥐’는 현재 고1 국어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또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를 비롯한 10여 권의 책은 프랑스어, 영어, 일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