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교육계의 큰 스승…백절불굴(百折不撓)로 일궈

  • 등록 2007.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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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뿌리를 찾아서 / 영원한 교장선생님 고(故) 이경환(李瓊煥)씨
장학재단 혹은 기념사업회 마련해야

   
 
글.조선일보 배한진 기자

# 아버지와 아들의 스승
태성중학교 3학년 때 저는 학생회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고(故) 이경환(李瓊煥) 교장선생님을 가까이서 뵐 기회가 가끔 있었죠.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저를 부를 때 꼭 ‘어이, 건선이!’ 혹은 ‘어이, 배 상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농협 상무이셨던 저희 아버지를 일컫는 호칭이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제가 학생회장이 돼 첫 인사를 드리러 간 날 “아버지는 뭐 하시냐”고 물으셨고, 제가 답을 하자, ‘아 건선이 아들이구먼!’이라며 좋아하셨습니다.
그 뒤부터 선생님께 저는 ‘한진이’가 아니라 ‘건선이’였습니다.
“어이! 건선이 요즘 공부 열심히 하나?”

얼마 전 태성중학교 옛 은사님들께 조촐한 저녁을 대접해 드리며, 이런 얘길 했습니다. 저는 학교 다니면서, 교장 선생님께 한진이가 아니라 건선이로 통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약간 섭섭하기도 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랬더니 선생님들께선 이러시더군요.
“네 아들 중학교 오면, 그때 우리가 네 이름 불러주면 되지 뭐.”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아버지의 스승이 아들을 가르치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또 그 아들이 아들을 낳아 학교를 보내도 아비의 이름을 불러주는 학교. 내천(乃天) 이경환 선생님, 그분이 가꾸신 태성학교 얘기입니다.

# 아쉬운 기념사업
이 잡지 ‘굿 피플’에 용인의 인물을 연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경환 선생님은 제게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많은 분들이 “왜 이경환 선생님을 다루지 않느냐”는 항의와 압력을 가해 오셨기 때문이죠.

맞습니다. 선생님을 빼놓고 용인의 인물을 논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용인에서 무수한 인재를 키워 내셨고, 그 무수한 인재들이 이제 사회 곳곳에 진출해 있습니다. 많은 선배들이 저를 야단치신 건 당연한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막상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니, 자료가 없었습니다.
이름 세 글자만 치면 컴퓨터에 신상정보는 물론 개인과 집안의 역사까지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입니다. 요즘은 웬만한 동네까지도 역사와 기록이 만들어집니다. 어지간히 자리 좀 잡았다 하는 사람들은 자서전도 많이 냅니다. 자서전이 아니더라도, 제3자가 기록한 평전이나 인물전도 많이 나옵니다.

웬만한 사립 학교에 가면, 그 학교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스승을 기리는 송덕비나 동상이 하나쯤은 다 있습니다.

이경환 선생님 정도 되시면, 그분의 호(號)나 함자를 딴 장학재단 혹은 기념사업회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도 없습니다. 이경환 선생님에 대한 그 무엇도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태성학교 한 구석 어디엔가는 선생님의 동상이나 송덕비 정도는 있을 줄 알았습니다. 없습니다.
바로 이게 태성의 현실이자, 용인의 현실입니다.

중3 겨울 방학, 그러니까 제가 수원에 있는 유신고등학교로 진학을 앞두고 있던 12월 말, 갑자기 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퇴임을 하시니 모두 모이라고.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학교를 가보니, 정말로 선생님 퇴임식이 열렸습니다. 정년도 남으셨다는 데 그것도 꽁꽁 얼어붙은 겨울에, 학생들도 많이 참석하지 못한 가운데, 이경환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교정을 떠나셨습니다.

그 땐 몰랐는데, 이것도 동문들 잘못입니다. 얼마나 동문들이 우스워 보였으면, 얼마나 동네가 시원찮아 보였으면, 아버지를 가르치고 아들을 가르친, 한 지역 교육계의 대표적 인물을 엄동설한 방학 중에 내쫓듯 퇴임을 시킵니까.

우린 1년에 한 두 번씩 학교 운동장에 모여 체육대회를 합니다. 물론 ‘태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말입니다. ‘태성 화이팅!’ 을 고래고래 외치고, 코가 삐뚫어지 게 술도 먹습니다. 태성인은 하나라고 다짐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수 별로 별도 모임도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따로 모임을 만들어 명맥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태성이 용인을 움직이고, 태성이 용인의 주축이라고 그렇게 믿고 얘기들 합니다.

좀더 확장해 이야기 하자면, 용인 전체가 그렇습니다. 용인초등학교도 똑 같은 형식으로 동문 모임이 운영되니까요.

이런 모임에는 정치적 성격도 있습니다. 이건 꼭 제가 얘기 안 해도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특정 개인을 중심으로 동문조직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선거 때가 되면 더더욱 그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좋습니다. 정치적 성격이 있던 말던, 동문들이 뭉치고, 지역 사회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우리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다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했습니까. 태성인 중에서, 혹은 용인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인물 중에서, 국회의원이 있습니까. 아니면 용인시장을 만들었습니까. ‘태성인이 최고’, ‘용인사람이 최고’라고 외치던 분들께 정중히 여쭙고 싶습니다. 그렇게 뭉치고 배타적 경계까지 형성한 ‘태성’ 혹은 ‘용인’의 결과물은 뭡니까.

# 동문의 뿌리를 찾아야
지난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태성동문 체육대회 때는 서정석 현 시장이 한나라당 후보자격으로 나타나자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맘에 안든다 이거지요. ‘당신은 태성인한테 잘못 보였다’는 경고이기도 했고요. 태성동문 뿐만 아니라 용인 시내 곳곳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죠.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서정석 후보 떨어뜨렸습니까.

용인의 자존심을 구기고 타 지역 출신한테 공천 줬다고 반발하던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거기 붙어서 정치생명을 끈질기게 이어나간 사람도 있습니다. 참 비위가 좋은 사람입니다.

결국 뭡니까. 다 웃기는 짓이라는 겁니다. 태성동문, 용인사람, 그거 다 부질없는 짓이고 앞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함께 모이면 천하를 점령할 듯 기세가 등등하지만, 결과는 아무것도 없는 것. 그게 태성인의 모습이자 용인사람의 모습입니다.
경기고 동문들은 고건, 손학규, 김근태, 정운찬 등 대권 예비주자 4명을 배출하고도 조용합니다. 강릉고, 춘천고, 전주고, 경남고, 부산고 등 전국 명문학교 동문들 하는 것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리 안나 게 조용히 밀고 당기면서, 국가의 요직을 모조리 차지하고 앉아 있습니다. 우리처럼 그렇게 요란스럽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이기만 하면 태성동문을 외치면서도 정작 이경환 선생님 동상 하나, 송덕비 하나 학교엘 세우지 못하는 동문들, 다른 데서 보면 우습다고 합니다.

저는 신문기자입니다. 그래서 늘 글을 쓰면, 취재를 하고, 확인을 합니다. 이 번 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이경환 선생님을 기억하고 회고하는 분들을 만나, 옛날 얘기도 듣고 추억도 듣고. 용인에서 이경환 선생님에 대해 회고를 할 분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그런데 용인에 선생님 동상 하나 송덕비 하나 없다는 얘길 듣고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 얘길 꺼내면 인터뷰 하는 분들 모두에게 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어렵사리 귀한 자료와 사진을 구했습니다.

글의 성격이 좀 삐딱해졌으니 자료를 주신 분은 공개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이제라도 제가 짧은 글로 선생님의 흔적을 정리하게 돼 참으로 기쁩니다.

# 36년간 교육계 헌신
태성학교는 1946년 용인 면장을 지낸 신현정 초대교장과 용인의 갑부였던 이병묵 설립자 등이 뜻을 모아 세웠습니다.

이경환 선생님이 태성에 부임하신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이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1924년 현재의 처인구청 자리에서 태어난 용인 토박이십니다. 당시에는 용인에 중등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서울로 유학, 수재들이 다니던 경복중학교(5년제)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경복 졸업 후 1944년 경성사범에 입학하셨고, 이듬해에는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다시 서울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해 공부를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부임 당시 수학 과목을 맡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농대를 나오셨으니, 농업을 가르치셨는 줄 알았는데 수학선생님이셨다는 내용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콤파스 없이 원을 그리는 실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교사와 교감을 지내시다가 1962년 교장에 취임하셨습니다. 38살의 나이였습니다.

학교 설립 당시, 설립자의 집안은 전국에서 손꼽히던 부자였지만, 점점 가세가 기울었고 선생님이 교장에 취임했을 때는 그 사정이 더욱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천막교실에서 사과 상자를 놓고 공부를 해야 했고, 교장은 물론 모든 교직원과 학생이 벽돌을 찍고, 리어카를 끌며 교실을 지었다고 합니다. 당시 선생님은 미군부대까지 쫓아가 원조를 요청했다고 하니, 그 정열을 짐작 할만 합니다.

이렇게 선생님이 일구신 태성은 어처구니 없게도 1983년 설립자의 손자인 당시 이사장에 의해 다른 재단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1986년 62세의 나이로 36년간 정들었던 교정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은 3년 뒤인 1989년 11월 16일 명을 달리하셨는데, 사모님 고(故)황영화 여사가 돌아가신 뒤 넉 달 만에 그뒤를 쫓으셨다고 합니다.

# “행동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라”
여기서 선생님께서 개교 20주년을 기념해 직접 쓰신 글을 인용해 봅니다. 참으로 명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나는 태성을 생각할 때 쌓여 있는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에 불사조의 태성의 얼과 단결의 힘을 자랑하는 태성의 전통을 역력히 보는 것이다. 잠깐 회고컨데 지난 20년 동안 태성은 파란중루(波瀾重壘) 속에서도 백절불굴의 웅거로 죽순처럼 성장하였고, 바야흐로 이제는 어엿한 스무살의 정열과 패기 넘치는 성인이 되었으니 진실로 힘차고 보람찬 내일을 기약하는 역군임을 자부한다. (중략) 본분이라는 것은 사람이 행하는 올바른 길이다.

즉 정도를 걷는 사람은 살고 그와 반대로 옳지 못한 길을 밟는 사람은 재언할 것도없이 사멸케 된다는 것은 우리들의 수많은 조상들이 몸소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다. 이와 같이 자명한 이치가 있고 또 누구나 잘 주지하고 있으면서 자칫하면 이 정도를 일탈하려고 한다. 그 원인은 주로 안일과 사치, 허영과 나태 그리고 자기중심을 잃는 데서 기인되고 있다고 본다. (중략) “행동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라” 이것은 본분을 지키는 근본이며 신념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은 어버이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이처럼 높고 넓은 기개를 가르쳐주신 훌륭한 스승이 계십니다. 한동안 그분을 잊고 지내지는 않았는지, 우리 후손들에게는 어떻게 그분의 업적을 소개할 지, 용인의 역사에는 어떤 식으로 그분을 기려야 할지, 이제 모두 함께 고민해 봐야 할 때입니다. 그분을 기억해 역사로 남기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그 자존심을 중심으로 모이면, 더 떳떳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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