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헌의 경영의 역사가 붓끝에서 빛난다

  • 등록 2007.0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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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물로 먹 갈아… 사상과 철학 ‘일필휘지’
Cover Story | 고헌(古軒) 이병서(李炳瑞) 회장

   
 
백두산 천지의 물로 일필휘지를 휘날린 고헌(古軒) 이병서(李炳瑞) 선생(70). 그는 백두산이 생긴 역사 이래 처음으로 천지 물로 먹을 갈아 굵은 획을 남겼다.

천지 옆에 천막을 치고 굵은 붓을 휘두르는 고헌의 힘찬 기백은 그의 청운의 꿈과 웅지가 어떠하였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志在千里(지재천리)’.
고헌은 천지의 물을 떠서 조조가 쓴 ‘步出東門行(보출동문행)’이라는 시에 나오는 ‘志在千里’라는 절구를 일필휘지 했다.

나이가 들었어도 천리를 달리고자 하는 천리마의 심정은 고헌이 다 펴지 못한 채 덮은 원대한 경영의 포부에 다름 아니다. 또한 그 심정은 영원한 현재 진행형임을 느낄 수 있다.

고헌은 일찍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제 윤리를 통해 자본주의 경제의 우월성을 간파한 인물이다. 그는 이론 뿐만 아니라 실물경제에도 해박해 70~80년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산 증인으로 우뚝 섰다.

평생 기업인이라는 외길 인생을 걷다가 뜻하지 않은 일탈의 기회를 맞아 뒤늦게서야 붓을 잡게 된 고헌. 그럼에도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대한민국 서예 휘호대회 대상 등 셀 수 없을 정도의 수상과 눈부신 성과를 냈으니 서예계는 물론 지인들도 놀랄 따름이다.

기업을 경영할 때는 기업인으로서 굵은 일필휘지를 날렸고, 이제 서예가로서도 그의 굵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의 붓끝에서는 외길을 걸어온 경영가로서, 혹은 학식을 겸비한 경제학도로서의 사상과 철학이 종횡무진 묻어 나온다.
그는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을 요약한 대작을 그의 고희 기념전에 전시했다.
또 ‘我思吾存(아사오존)’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불란서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유명한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Ergo-Sum)을 고헌은 일필휘지했다.

이는 동양 사상과 고전 등을 써내려가는 보편적인 서예계의 흐름에서 접할 수 없는 독창적인 경지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서예를 접하면서 결코 딜레탕티즘에 빠져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장엄한 자연과 한없이 광활한 우주, 그 속에 인간과 인간의 삶을 함께 품고 있는 서예술에 대해 감히 예술적 형식이나 예언적 형식으로 표현할 능력과 자질이 저에겐 없습니다. 다만 사소하나마 내가 살아온 삶을 피드백 할 뿐입니다.”

고헌 선생은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60년대 말 한국특수화학주식회사를 설립, 30여 년 간 경영일선에서 동종업계의 이목을 집중 시키는 신화적 기업을 이뤘다. 그러나 대기업으로의 전환 직전인 1998년 고헌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IMF의 직격탄을 맞아 스러져야 했다.

“일제시대에 나라를 빼앗기는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고헌은 전 재산을 털어 모든 부채를 정리했다. 주변에서는 재산을 지킬 것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고헌은 모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희생을 감수했다.
세금을 잘 내는 100대 기업 안에 들 정도로 정도경영을 지켜온 고헌의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하겠다.

오로지 열정과 정성으로 쌓아올린 경영의 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엄청난 실의와 좌절에 빠진 고헌.
고헌은 깊은 실망의 늪에서 생에 대한 애착을 잃고 건강마저 크게 악화됐다. 이때 40년을 넘게 그와 동고동락해온 부인 김광숙 여사(68)의 권유로 서예의 길로 들어섰다. 경영가로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서예술의 세계지만 그는 두 세계를 모두 대가의 경지에서 경영하고 있다.

# 서예삼매경
부인은 거의 종교적인 신념으로 서예를 권했다. 마음의 평정을 잡기를 바라는 오롯한 마음에서.
“사업을 정리하신 후 마음의 갈등이 심했어요. 뭐 하나라도 집중해야만 할 것 같아 서예를 권했지요. 워낙에 필체가 좋으셨어요. 노후에 애들을 위해 작품을 남길 것이다 생각했죠.”

그러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붓을 잡은 고헌은 획을 긋기 시작한 지 채 5년이 안 돼 평생을 서예에 몸담고도 이루어 내기 힘든 대가의 경지에 다다라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가 지난해 신라호텔 고희 기념전에 선보인 80여 편의 작품을 대하며 모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고헌은 2002년 초 예술의 전당 서예 강좌를 통해 서예에 입문하면서 젊은 스승한테 물었다.
“지금(66세)부터 시작하면 고희(70세)에 전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스승이 웃으며 서예는 사업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20~30년 붓을 잡은 사람들도 전시한번 못해보는 경우가 많은데다 기본 5체만 하더라도 한 체에 수년씩만 잡아도 5체면 십수년이라는 계산이 나오는 게 아닌가.

그래도 고헌은 해야만 한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을 아껴줬던 주위의 많은 사람들한테 그간의 무심함을 조금이라도 용서받고 싶었다. 스승한테는 세월은 따지지 말고 지도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일주에 2회 강의를 받고 나머지는 집에서 밤낮없이 쓰고 또 썼다.

“아침 일찍 붓을 잡기 시작해 피곤하다고 느껴져 이제 좀 끝내고 잠을 자야지 할 때면 어느새 다음날 아침 7시가 돼 있었지요.”
고헌은 혼을 쏟아 부었다고 말한다. 모든 잡념이 없어지고 오로지 서예 하나만을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예의 근본을 제대로 알자는 탐구열에 중국도 많이 찾은 고헌은 어느 날 배낭을 챙겼다. 우리나라 중진 서예가 10여명과 함께 백두산에 가서 천막을 친 것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작품을 쓸 때 마침 중국 상해의 서예학교 교수 한분이 내 모습을 사진 찍었어요. 천지에서 천지 물로 붓글씨를 쓴 일은 자신이 알기로는 중국 역사상 없었던 일로 한국인인 내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고 했지요. 자기들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라며 감탄했어요.”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헝클어진 마음을 다스려 보고자 잡은 붓. 그는 이제 새롭게 서예를 공부하는 학인(學人)의 자세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붓을 놓지 않을 것이라며.
고헌 선생의 일생을 찰라와 같이 대했지만 안쓰러움과 경외감이 마음에서 절로 우러남을 느끼며 이 세상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 큰 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현재 기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여전히 기업가 정신, 경제학도의 정신으로 무장한 채 자손에게 깊은 교훈을 물려주고 있으며, 서법과 서도를 함께 아우르는 서예로 또 하나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기업의 신념은 철학의 꽃’ ‘기업은 예술의 극치’
“기업의 신념은 철학의 꽃입니다.”
고헌은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을 요약해서 그의 고희 기념 서예전에 전시할 정도로 경제학 철학 사회학 역사학 등 학문에 대한 조예가 깊다.

그의 기업관은 철학에 맥이 닿아 있어 관념적이지만 그의 말을 계속 듣다보면 의외로 가슴에 시원스레 와 닿는 심중을 읽을 수 있다.

“기업하는 사람이 왜 훌륭하냐 하면 많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영자를 존경하고 밀어주며 용기를 줘야 합니다.”
고헌은 “기업은 예술의 극치”라고도 말한다. 예술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평생 기업가의 삶을 살아온 고헌다운 말이다.

그는 기업과 예술세계를 넘나들면서 기업을 예술의 극치로 표현하고 있다.
기업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수단이고, 예술은 철학인데 수단과 철학은 현실적인 면과 이상적인 면으로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소질과는 무관하게 정말 어려운 게 기업이고 따라서 기업의 가치는 혼과 정성을 다하는 예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유의 바다
고헌 선생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무엇보다 그의 깊은 인품에 감동하게 된다.
그는 조선조 오리 이원익 대감의 12세손으로 고매한 기품과 겸손함이 몸에 깃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해박한 지식과 깊은 식견이 오랜 세월동안 심신에 깃들고 깃들어 은은한 묵향처럼 향기롭게 풍겨 나오고 있음을 단번에 느낀다. 오히려 그는 평생 거칠고 험난한 경영의 고개를 넘어온 기업계의 큰 어른이라기보다 학문의 길을 걸어온 대학자인 듯 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대학 3학년 2학기 때였을 겁니다. 미칠 정도로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경제학 전문 서적과 원서를 동대문시장 헌 책방에서 싸게 사다 놓고 가정교사 생활 틈틈이 밤을 새워가며 탐독했습니다. 그때 원서 100권을 넘게 읽었죠. 평생을 살면서 그 토록 책을 읽고 싶었던 시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던 것 같아요.”

헤겔의 변증법부터 데카르트, 칸트는 물론이고 좀바르트, 마르크스, 베버, 아담 스미스, 케인즈, 슘페터, 사무엘슨 등 젊은 시절 습득한 지식은 경영의 원천이었으며 평생토록 깊은 사유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고 있다.
맏딸이 이화여대를 수석 입학했다기에 고헌 선생님도 그러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하니 그는 수석은 못했고 2등으로 입학했었다고 고백한다. 서울상대 2등 입학을 아이처럼 부끄러운 듯. 그는 대학생활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2학년 때 전교에서 한명에게만 주는 ‘ALL A’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수재였다.

그의 일생은 명석한 두뇌 탓도 있지만, 미친 듯한 순수한 열정과 집중에 감동한 신이 많은 은총과 선물을 내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이끌던 한국특수화학주식회사의 성공 신화는 하버드대의 케이스 스터디 교재로 활용됐을 만큼 고헌은 신화적 기업의 주인공이었다.

# 고난의 청소년기
그의 부친은 6.25때 42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쳤지만 고헌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수재였던 부친은 3.1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던 곧은 성품의 소유자로 6.25 바로 직전 해에 서천군수로 부임, 최초로 한산모시조합을 설립해 군민소득의 향상을 꾀했던 실사구시의 삶을 살기도 했다.

부여 만석지기 부농의 맏딸로 어려움을 모르고 생활하던 어머니는 졸지에 3남 2녀를 거느린 가장이 됐다. 둘째였던 고헌은 어머니와 함께 집안을 꾸려 나갔는데 어머니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아들 3형제가 모두 서울대를 졸업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유복했던 유년시절과는 달리 당시 대전중학교 1학년이었던 고헌은 새벽 4시에 신문 배달을 하는 등 고난의 시절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되겠다는 꿈과 야심만은 누구 못지 않게 키웠다. 역경 속에서도 마침내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울대 상대에 진학하게 된 고헌.

“김일성 대학 경제학 교수로 계시다가 서울대에 오셨던 유진순 교수님으로부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비교분석’ 강의를 들었어요. 그 뒤 저는 파출소에 신분증을 맡기고 칼 막스의 캐피탈리즘 빨간표지 책을 읽었어요. 나는 과연 막스의 자본론보다 베버, 케인즈, 슘페터 등의 자본주의 이론이 왜 옳은가를 알게 되었어요.”
학문에 대한 열정은 파출소에 신분증을 맡길 정도로 뜨거웠고, 그의 마인드는 그때부터 하나 하나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했다.

서울대 상대 졸업학기 때 고헌은 박희범 교수로부터 앨버트 허쉬만의 ‘균형경제성장론과 불균형성장론’ 강의를 들었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국부를 실현하려면 특히 그 당시 아직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에 딱 들어맞는 이론이구나 싶어 열심히 경청했고 원서를 사서 몇 번씩 탐독하기도 했다.
1961년 서울 상대를 졸업할 당시 흔히 공부 잘하는 학생, 특히 서울대 상대생들이 취직하는 금융계에 가지 않고 한국나이롱(주)(현 코오롱)에 취직했다.

사원에서 주임으로 승진할 당시 정부는 한국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다.
“울산석유화학 Combinat의 착공과 그 위성공장의 설립계획이 발표될 때 박희범 교수가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있는 것을 알았어요. 박교수는 허쉬만의 ‘균형경제성장론’을 거의 그대로 실천 적용했고 결과는 대 성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고헌은 언젠가 석유화학계열의 제조공장을 직접 설립, 운영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결국 그는 꿈을 이루었다.

# 경제 신화의 주역
1968년 한국나이롱을 퇴사하고 가내공업 형태의 석유화학 최종계열인 도료공장을 설립했다. 적은 돈으로 시작해 7명의 종업원으로 회사 운영의 첫발을 내딛었다.

이때 하루 두 끼로 식사를 때우고 지프 안에서 토막잠을 자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러한 열정으로 10년 뒤에는 종업원 150명 규모로 성장 가도를 달리게 됐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최초의 성장 동력을 얻었다. 1969년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모티브가 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만 해도 흰색 노랑색 차선 페인트를 일본에서 대량 수입해 사용했다. 고헌은 1970년 국내 대기업과의 경쟁 입찰에서 이겨 최초로 국산제품으로 대체 납품하기 시작했고, 이때 1년간의 연간 납품은 회사 운영에 큰 도움이 됐다.

1973년까지만 해도 육해공군은 전량 미군이 쓰던 도료를 사용했다. 1974년, 역시 고헌은 국내 대기업과의 경쟁 입찰에서 승리해 대체납품을 시작했고 이때 납품총액의 절반이 되는 거액의 선수금은 종자돈이 돼 회사 확장의 여력을 가지게 했다.

1978년에는 한국 최초로 미국에 수출하는 도로표지용 도료의 품질시험에 합격, 입찰자격까지 따냄으로써 품질과 기술면에서 한발 앞서가게 됐다. 이때부터 한국특수화학제품은 미국에 더 많이 알려졌다.
한치의 빈틈도 없는 계획 하에 일을 추진하는 고헌은 항공기용, 선박용 군장비는 물론 건축용 도료까지 전 분야에서 급속한 기술발전을 시킬 수 있었다.
고헌의 일생은 제조회사 창업과 그 경영이 전부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32세부터 64세까지 33년간 인생의 황금기를 제조업과 함께 했다.

고헌은 기업을 하면서도 경제학도로서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재학 때는 물론 졸업 후에도 훌륭한 스승들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던 것은 이런 자세에 기인한다.
그 가운데 황일청 박사는 1973년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의 Entrepreneur-ship Workshop 3개월 과정에서 만났다. 고헌이 한국 기업인 대표로 참가했을 때 학계 대표로 왔던 그를 처음 만나 그때부터 황 박사와 인연을 맺게 돼 진정한 산학협동을 이뤘다.

황 박사는 한국특수화학의 눈부신 성장과정을 성공사례로 엮어 ‘한국경제학회지’에 올렸고 이는 영역돼 미국 하버드 대 비즈니스 스쿨 케이스 스터디 자료로 쓰였다.

# 흥미로운 일화 몇가지
그는 기업을 하면서 특별한 취미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와인에 대해서는 지금도 흥미를 가지고 있다.
회사가 커지면서 첨단기계를 수입할 당시 영국 제품이 그가 원하는 가격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포기하고 파리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영국회사의 담당 이사와 포도주 한 병을 사서 마시게 됐는데 그 와인이 마침 그가 아는 적포도주였다.

그래서 그가 아는 대로 카버네 쇼비뇽 포도 얘기와 포도주의 빈티지, 포도별 맛과 포도주와 음식 궁합 등의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한참 뒤 갑자기 그 이사가 자신이 책임지고 회사를 설득해 원하는 가격으로 조건 없이 계약하겠다고 말했다. 고헌은 서양문화에 대한 이해로 얻은 신뢰로 대형 비즈니스에서 개가를 올린 놀라운 경험을 했다.
고헌은 기업을 하는 동안 한국페인트잉크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두 차례 역임했고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이사와 UR 대책위원장, 정책위원으로 중소기업계의 이익을 위해 기여했다.

2000년의 6·15남북공동선언 보다 훨씬 앞선 1998년 1월, 남북한 최초로 민간인 특사이면서 중소기업 방북단대표 자격으로 비밀리 평양에 가서 북한측과 경공업 지원 협상을 할 때의 일이다. 합의문이 모두 북쪽에서 쓰는 말로 돼 있기에 고헌은 “우리측 것은 우리말로 다시 고쳐 작성하자. 그래야 우리도 돌아가서 위에 보고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국제관례다”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이 한 일에 이의를 달기는 처음 있는 일이라며 좌중에 긴장감이 돌았다. 그 때는 방북자체가 목숨을 건 위험천만의 시절이었다. 따라서 자칫 그 말한마디가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결국 “리선생 동지 말씀을 접수합네다”라는 말을 들었다.

1992년 바르샤바 세계중소기업가협의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을 때도 개회식장에 태극기 대신 북한 인공기가 단상에 올라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주최측에 격렬히 항의하고 즉각 시정 및 사과 방송 등을 요구했다. 이때 총회에 와 있던 바웬사 대통령이 사과하고 시정을 약속해 회의에 참석했다.
잘못된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그의 강직한 성격이 남긴 일화들이다.

# 부인 녹우당
그는 부인에게 녹우당(鹿愚堂)이라는 당호를 줬다. 평생을 그의 옆에서 소리 없이 내조해온 부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지었다. 서울상대 친구인 김광연(SK계열 석유회사 사장 역임)씨의 여동생으로 전 감사원 사무총장의 큰 딸이었다.

고헌이 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때 녹우당은 서울에서 용인으로 내려와 서광농장을 운영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농사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던 부인이지만 과수부터 축산까지 농장 일을 척척 해냈다.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재미있었고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일본의 과일농장을 연구 분석할 정도로 열정과 근면을 겸했던 녹우당의 노력은 튼실한 포도송이와 사과열매를 맺어놓기에 이르렀다.

녹우당의 농장은 1970년대의 척박하기 그지없던 용인에 길을 닦았고 동네 주민들에게 각종 일감을 만들어줘 지역 경제에 기여했다. 두 부부의 많은 지인들의 발자취가 서광농장에 서렸다.
녹우당은 자녀도 잘 키웠다. 큰 아들은 할아버지의 경기고 후배고, 고헌의 서울대 상대 30년 후배다. 둘째 아들은 미국 코넬대와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 MBA를 마쳤다. 큰 딸은 영동여고를 수석졸업하고 이화여대를 수석 입학했다.

“저는 이제 종심의 시간대에 와 있습니다. 아들과 딸 손자 손녀 즉 후손들이 자신은 물론 세상과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주고 싶습니다.”
현재 양제벤처타워 회장으로 있으면서 녹우갤러리라는 타이틀을 단 고즈넉한 용인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고헌. 그는 종심의 시간대를 정리하고 또다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청년의 꿈으로 비상할 것 같은 예감이다.
박숙현 기자 europa@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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