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야생화 천국을 만들다

  • 등록 2007.04.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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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한택식물원 이택주 원장
20만평 빼곡히 귀한 식물들 자리
자생종 멸종위기서 구한 자원의 보고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 식물원 하나 없는 나라에 식물원을 만들어 준 사람. 그것도 동양 최대의 식물원을 만들어 나라의 체면과 위상을 세워준 사람. 이택주 원장(67)이 그렇다.

3월 17일,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토요일 오후,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한택식물원(용인 백암면 옥산리)을 즐겁게 둘러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하다.
30여년 전 허허 벌판이던 이곳에 과연 누가 이처럼 자랑스런 식물원이 생기리라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누가 이처럼 완벽한 식물원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택주 원장을 만나 식물원이 만들어진 과정에 이야기 들으면서도 머릿속에는 기적 이라는 단어가 맴 돈다. 20만평에 빼곡히 자리한 귀한 식물들. 한 사람이 이뤄냈다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생식물의 보고인 한택식물원은 들에서 소리 없이 피고 지는 식물들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피고 지고 하면서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왔다. 꿈결같이.
원래 국가 차원에서 이뤄져야 할 일을 민간인 개인이 이뤄냈으니 감사와 존경심이 절로 우러난다.
자생식물의 아버지 이택주 원장이 이뤄낸 기적.

“유럽 선진국을 돌아보니 식물원이 다 있는데 우리나라는 없었지요. 왜 없나 조사하다보니 UN 가입국 중 없는 나라는 대한민국뿐 이에요. 뭐한 얘기지만 서구 열강하의 남미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은 식물원을 다 가지고 있었어요. 일본의 지배를 받은 우리나라는 식물원이 없어요. 일본은 지금도 중진국 수준이에요. 공산국가들도 기초과학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식물을 중요 자원으로 인식해서 북한도 당시 식물원을 두개나 가지고 있었어요. 사명감에 내가 해보자고 한 것이 지금까지 하게 된 거죠.”

1979년 그는 황무지로 뛰어들었다. 식물에 대한 기본 인식조차 없던 시절, 자생 식물이 잡초처럼 홀대받던 시절, 우리나라의 산야를 혼자서, 그것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발로 걸어서 고생길로 들어섰다.
당시 그의 선구적인 노력은 돈도 안 되는 일을 한다는 비웃음만 샀다. 들에 핀 들풀들을 옮겨다 심는 그의 모습이 어떻게 비췄으리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70년대의 남산식물원이요. 그건 식물원이 아니에요. 온실 지어놓고 선인장 심어놓은 곳을 식물원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식물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야기에요.”

“식물원이란 우선 미래자원이 되는 식물의 종을 많이 확보해야 하고, 둘째, 그것을 잘 관리해 귀한 자원을 공개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식물 연구를 위한 연구소와 국민 교육을 위한 교육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식물원은 단지 관상용 식물이 전시돼 있는 곳이 아니라, 식물자원이라는 기본 인식 하에 4가지 기능이 갖춰진 곳을 일컫는다고 일러준다.

한 젊은이가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 30여년의 세월을 식물 하나만을 위해 땀 흘려 달려오는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몇이나 식물 자원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식물원의 정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부끄럽기만 하다. 나부터도 관광식물원을 식물원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식물은 미래자원
“선진국에서는 청소년 교육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식물과 자연은 애국심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로라는 인식하에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을 중점적으로 실시하지요.”
“선진국에서는 자원 중에서도 식물 자원을 가장 중요시 여겨요. 식물은 최초의 먹이사슬이잖아요. 식물이 없으면 생물이 존재할 수 있겠어요. 모든 생명의 근원이지요.”
서구는 식물원이 보통 100년, 200년 됐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식물원 관련법이 생긴 지 5년밖에 안됐다. 그가 자생식물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지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법이 만들어 졌다. 이 원장은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뒤쳐져 있는 가 가슴 답답해한다.

“선진국들은 식물원을 국가가 하거나 기업이 합니다.”
미국의 시카고 식물원은 시카고 경제인이 모금을 해서 운영을 하고 나머지는 국가가 책임진다. 롱우드 식물원은 듀퐁사가 운영을 한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거의 국영이다. 식물원은 공익적인 것임에도 우리나라는 정부가 하지 않고 민간이 한다.

뿐만 아니다. 시민사회단체가 나서서 식물원에서 정성스런 봉사 활동을 펼친다.
“선진국들은 어느 특정분야의 사람이 아니라, 사회 지식인 전반이 식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죠. 식물은 약용, 식용 등 산업자원의 핵입니다.”

“호주 사람들은 49%가 식물원에 갑니다. 식물 사랑이 나라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택주 원장은 3월 10일부터 17일까지 호주정부의 초청으로 호주를 다녀왔다. 식물원일도 바쁜데다 평소 어디를 다녀오는 것도 삼갔지만 호주정부의 극진한 요청으로 끝내 허락했다. 비행기 좌석이 퍼스트 클래스인데다 특급호텔까지 모시며 그를 국빈대접 했다.

“내가 뭘 대단하다고 초청을 하고 국빈대접을 합니까. 한택식물원을 높이 평가한 거죠. 식물원 원장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하는 호주정부의 마인드가 존경스럽기만 하죠.”
호주의 시드니, 캔버라, 멜버른 등지의 식물원을 둘러보면서 놀란 것은 그들은 기존 식물원 외에도 200만평 규모의 자생 식물원을 또다시 조성한다는 사실이다.

“한택식물원 조성 시 우리나라 식물만 심어놓은 자연생태원이 선견지명이었다는 다행스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택주 원장은 말한다.
“자생 식물이 첫째에요.”

#식물 생태의 1인자
백암면 옥산리 출신인 그는 원래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열심히 토목 건축일을 하며 부를 쌓았다.
“60년대, 70년대는 넓은 초원에 목장을 하는 것을 동경하던 시절이었어요. 나도 그랬죠. 남진의 노래도 있잖아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그는 선산과 임야를 매입해 초지를 일구고 농장 경영에 나섰다가 74년 한우파동 때 농장이 망했다. 그 후 초지를 접고 식물원을 시작했다.

79년부터 그는 자생식물 채집을 위해 본격적으로 전국 팔도강산을 누볐다.
“유감스럽게 외국 식물은 돈 주면 다 살 수 있는데 우리나라 것은 돈 주고도 못 구했거든요. 찾아 나서야 했죠. 종자를 따다가 파종을 했어요.”
한라산 지리산 어느 산 할 것 없이 수 십 번씩을 오르내렸다. 한라산 식물이 가장 많은 곳은 1년에 8번 한 장소로 오르기도 했다. 그래야 식물의 생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닷가며 물속이며 20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 안 다닌 데가 없다. 광적이었다. 결국 디스크까지 앓았다.
“그런 공을 들여야 식물을 알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식물 생태의 일인자임을 자부해요. 식물을 직접 체험했거든요. 식물의 생태를 모르면 가꿀 수가 없어요.”
그는 최초로 야생화를 재배한 사람이다. 물론 안 되는 식물이 있다. 백두산이나 한라산 같은 고산지대의 것들은 적응을 못한다. 영국 같은 나라는 냉방온실이 있어서 가능하지만 민간의 한택식물원이 여름 냉방온실을 운영하기란 경제적으로 어렵다.

이 원장의 광적인 열정도 한때 위기에 직면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재정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해 일궈놓은 재산을 하나 둘씩 한택식물원에 투자하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식물원 일을 접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당시 리우 환경 협약이 맺어지면서 국제 규약인 사이티스(CITES)가 대두됐다.
“자기 나라의 자원은 미래의 주요 자원으로서 각 나라는 동식물자원을 멸종 위기에서 책임지고 구제하라는 내용이었어요. 결국 야생화였던 거에요.”
사이티스 대두로 야생화를 심었던 한택식물원은 언론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책임감과 사명감 때문에 차마 한택식물원을 접을 수 없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른 것이다.

#공개원 조성
서식지외 보존지역 및 연구단지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서원은 약 13만평이다. 구릉지대로 아늑하고 넓은데다 나무나 식물이 많다.
“공개원을 하려다보니 내가 심어놓은 풀이 너무 많았어요. 복잡했죠. 그래서 97년부터 서원 쪽 것을 옮겨다가 동원, 즉 일반에게 공개하는 공개원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외국인들이 설계가 잘 됐다고 평가한다. 나무 하나, 풀 하나 있을 자리에 있고, 모양도 잘 다듬어져 있다고 칭찬한다. 토목을 전공한 이택주 원장이 직접 설계한 작품이다.
한택식물원은 내용면에서 동양 최대. 외형은 중국에 더 큰 식물원이 있다고 하지만 7만평 동원을 도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관람객들은 지도를 보고 돌아야 한다. 그런데 이택주 원장은 20만평의 구석구석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눈 감고도 훤하다.

아침부터 해 넘어갈 때까지 365일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식물원에서 사니 당연한 일이다.
“식물원일은 계획을 세우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날 한시도 식물원을 벗어나기 어려워요.”
하루 하루 생겨나는 일에 따라 그날 그날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가물면 물 줘야 하고, 비가 많이 내리면 배수로를 터줘야 하는 등 어린 아이 키우 듯 애지중지 손길이 필요하지 않은 날이 없다. 야생화 때문에 여름철 잡초도 제초제는 엄두도 못 낸다. 그 넓은 식물원의 풀을 일일이 손으로 뽑아야 한다.
“한구석 가면 하루해가 가요.”

70년대에 골프를 싱글까지 했던 이 원장은 식물원을 하면서부터 그 좋아하던 골프도 치지 않는다. 골프장에 가서도 식물원 걱정에 도통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골프를 끊은 지 벌써 20년이 됐다. 토목건축 일을 하던 사장들은 은퇴해 골프를 치고 있지만 늘 할 일이 많은 이 원장을 부러워 한다.

#한택식물원의 역할
한택식물원은 서식지외 보존기관으로서 우리나라의 주요 식물의 개체가 줄거나 없어지면 매년 그것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세계적인 식물원인 영국의 큐 가든은 전 세계 식물관이 있어 외국의 자생식물을 복원해 준다.
한택식물원은 공개원의 아름다운 관람처로서 뿐만 아니라 이처럼 우리나라 자생종을 멸종위기로부터 구해내는 자원의 보고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연구동은 희귀멸종위기의 식물을 대량 증식하는 방법이나 희귀식물 복원 방법, 야생화 재배 매뉴얼 등을 개발하고 자생식물의 농업화 산업화 등도 연구한다.
“사명감을 가지고 온 힘을 기울여 일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진즉에 알았으면 안했을 겁니다. 그런데 일은 힘들어도 성취감이 큽니다. 아무도 안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힘들어 할 새가 없습니다. 돈이 떨어져 잠 못 이룰 때 두요.”

이 원장에게는 몇가지 바램이 있다. 한택식물원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잘 정비돼 어디서도 식물원을 찾아오기 쉽게 하는 바램과 숙박시설이 있어서 교육 등이 효과적으로 이뤄졌으면 하는 희망이 그것이다.
끝으로 아주 중요한 바램이 있다. 재정의 안정이다. 2003년 공개원 개장 후 그나마 입장료 수입이 생겼지만 여름, 겨울철 비수기가 있어서 재정적 안정이 시급하다 .
“내가 죽더라도 한택식물원이 영원하도록 하려면 적자를 안 보게 재정적으로 기반을 잡아 후세에 물려줘야 하거든요.”

그는 2000년에 한택식물원을 재단법인으로 만들었다. 개인의 소유를 놓은 그는 한택식물원이 국민의 품에서 국민의 식물원으로 영원히 존속할 수 있기만을 열망하고 있다.
박숙현 기자 europa@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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