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미술, 두개의 DNA를 가진 사나이

  • 등록 2007.09.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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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가수·화가 & 방송인 조영남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10월 26일까지 개인전…미술쇼라 명명
“창작이 괴로우면 안하면 되지 뭣 하러 하나”…창작의 본질은 ‘재미’


“현대 미술 사상 최초의 일일 거예요. 화려한 최신식 미술 전시를 연 거죠.”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10월 26일까지 개인전을 열고 있는 조영남(61)씨.
가수이자 화가인 그가 호텔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미술전시회를 열면서 미술쇼라고 명명했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우선 자신의 개인전을 닫힌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에서, 제목 또한 ‘조영남 미술쇼’라고 명명한 것에 대해 그는 매우 즐거워 했다.
“어떤 분은 마술쇼 하는 줄 알았데요. 미술전시회에 처음 쓰는 말이니 그럴 만 하죠.”
제목부터 에피소드를 낳은 전시회. 그는 무려 500여명이 북적이는 대 성황속에 전시회 막을 올렸다. 과연 쇼라고 붙인 제목이 100%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쇼라고 명명할만한 전시의 특징은 또있다. 조영남은 음악을 미술에 접목시킨 부분을 이야기 한다. 그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음악을 작곡했고, 그것을 미술로 표현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작곡을 미술화 시킨 것이다.
“앞으로 미술쇼나 음악쇼로 가야해요. 전람회, 음악회는 구식이고 무겁고 딱딱해요. 전람회라는 말은 일본서 유래된 거 아닌가요. 쇼라는 간단한 말이 있잖아요. 쇼 우습게 보면 안되요. 아트 쇼예요.”
쇼라는 말을 고상한 미술 전시회에 처음 명명해 성공한 케이스라서 따라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 조영남. 그는 쇼라는 말은 일단 친근해서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모은다고 이야기 했다.
“미술전시회한다고 하면 가뜩이나 미술에 거리감 느끼는데 미술을 더 멀게 느끼게 하는 거죠. 그러나 미술쇼라고 하면 뭔가 막힌 벽을 허물어 뜨리는 듯 소통감을 줘요.”
그는 호텔 측에서 전시하라고 장소를 빌려 준 것도 제목 못지않게 혁신적인 부분이라고 했다.
1층 로비를 장식하고 있는 200~300호에 이르는 대형 작품들을 비롯 지하 1층까지 40여점의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다.
일찍이 화제를 모았던 화투 그림부터 바둑, 바구니, 태극기, 코르크 마게 등을 다룬 시리즈 작품들이 호텔 벽을 압도하며 화려하게, 그리고 친근하게 눈에 들어온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 재능
“어려서부터 잘 그렸어요. 음악, 미술 모두 잘했어요. 그런데 미술을 배우려면 돈이 많이 들고, 나중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 노래를 전공했어요. 서울대 음대를 다니면서 1964년 ‘딜라일라’라는 번안 가요로 한국 가요계에 데뷔했는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고, 그 와중에 학교를 중퇴했어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명예졸업장을 받아 가까스로 졸업했어요. 미술에는 학력이 없어요. 독학 했어요. 요새 허위 학력이 문젠데 허위로 댈 것도 없어요.”
조영남은 1973년 서울 안국동에 있는 ‘한국화랑’에서 첫 전시회를 가진 이후 오늘날까지 50회 넘게 전시회를 가졌고, 2000점 넘는 작품을 그렸다. 그는 서울 부산 뉴욕 LA 등 세계 각지에서 화가로서 작품 전시를 계속해오고 있다.
유명한 화투 그림부터 태극기, 바구니, 바둑 등이 그가 다루는 작품의 주된 소재다.
“옛날에 남관,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회고전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가들의 큰 전시회를 가봤더니 그림이 단조로왔어요. 물론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거죠. 박수근의 여러 작품을 봐도 그게 그거 같고 나는 통 재미가 없더라구요. 그들은 단조로움으로 성공한 거예요. 김창렬도 물방울만 보여주는 거잖아요. 나는 그때 앞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재미있게 해야겠다, 최소한 전시하는 방마다 다른 소재를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찍부터 신경을 썼고, 그때부터 무심코 그려놨던 게 오늘날 선보이는 이런 것들인 거죠.”
언젠가 큰 전시회를 할 때 재미있는 전시회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여러 소재를 개발해 놓은 것이 화투, 바둑, 바구니, 태극기 같은 것이라는 조영남.
드디어 때가 와서 지난 2005년에는 전주 ‘소리문화의 전당’ 1~3층까지 1500㎡(500평)에 이르는 대규모 전시장에 그가 평소 그려놨던 다양한 시리즈 그림 450점으로 도배를 했다. 사람들은 그 넓은 공간을 재미있는 그림으로 몽땅 채워 놓은 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
“아! 드디어 나한테 이런 때가 오는구나. 지자체가 되면서 전시장이 커지기 시작해 나 같은 화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구나. 내가 태극기만 450점 했다면 누가 재미있게 봤겠어요. 김윤순 한국미술관 관장은 내 그림 전시회가 재미있어 난리 났다며 서울에서 버스 한대를 몰고 내려왔어요. 누가 보랴 했는데…. 전시회는 그렇게 성황이었고, 이번에 본격적으로 처음 서울에서 하게 됐어요.”
대한민국의 전시장 가운데 가장 큰 것이 1500㎡(500평)이고, 조영남씨의 전시 공간 기준이 1500㎡이다. 그 공간을 커버할 소재를 이미 그는 발굴해 놨다.
“조각도 하니까 그 넓은 공간을 따분하지 않고 재미있게 메워줄 수 있을 겁니다.”

#화투 그림
“화투에 가장 의미를 두지요. 화투에는 철학적, 문학적, 정치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의미가 들어있어요.”
화투, 바둑, 태극기, 바구니 등 일련의 시리즈 작품들 가운데서 그는 화투 그림에 가장 의미를 두고 있다고 했다.
철학적 의미란 4000만이 화투패에 인생사 재수를 맡기고 산다는 것이요, 문학적이란 화투패 하나 하나에 손님이다, 행운이다 스토리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철썩같이 다 믿고 있으니 이보다 더 문학적일까.
정치적 의미란 우리가 일본을 가장 싫어하지만 일본 싫어하면 일본 똥도 싫어해야 하는데 지금 사람들이 일본 그림을 밤 낮으로 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모순이고 이중성이라는 것이다. 죽은 사람 옆에서도 3박 4일 치는 게 우리란다.
카드는 멋있게 폼 잡아 가면서 치면서 일본은 나쁜놈, 웬수 해 가며 화투패를 슬금슬금 치는 것은 병든 사회가 아니고 뭐냐는 것이다. 떳떳하게 치든가, 싫어하면 안치든가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 이중성이고 주체가, 줏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영남은 “이왕 사람들이 이걸 좋아하니 이걸 까자”라는 생각에서 30년 동안 화투를 그려왔다고 했다.
예전에는 화투 그림보면서 아이들 교육 운운했지만 지금은 애들이고 뭐고 상관없이 화투 그림이 엄청 잘 팔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화투에 대한 개념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것이 지식인, 예술인이 해야 하는 사명이고 예술가의 본분을 다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태극기 화투 등의 소재로부터 다른 소재로 옮겨가려는 노력은 크게 시도하지 않을 듯 하다. 기존의 소재만으로도 1500㎡의 공간을 채우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예술 감각은 사물을 그냥 놔두는 법이 없다. 콜크 마게부터 오래된 낡은 주판까지 우리 시야를 지나치는 평범한 물건들을 그는 작품에 슬슬 등장시키고 있다.

#아이디어나 예술혼이나 같은 것
“창작의 고뇌요? 고뇌 스러우면 그리지 말지. 애는 고생해야 낳는 거니까 고생한다 쳐요. 그러나 창작이 괴로우면 안하면 되지 뭣 하러 고뇌하면서 하나요?”
그는 미술 작업을 재미있게 한다. 미술을 좋아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세계가 펼쳐지니까 재미있는 것이다.
“예술은 재미에요. 이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있다면 이거 안 해요.”
예술의 정의를 그는 재미라고 했다. 무슨 무슨 거창하고 거추장스런 의미를 부여하려 들지 않는다.
고인이 된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인 백남준이 “예술은 계산된 사기다”라고 예술의 본질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 했듯, 그도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은 꾸밈없는 솔직함과 순수함으로 예술, 미술에 대한 정의를 이야기 한다.
“예술혼이나 아이디어나 다 같은 말이에요. 예술을 하면서 왜 고민하는가 하면 아이디어가 안생기니까 그러는 거에요.”
인터뷰 하는 내내 그는 재미있게 사진을 오려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사진 속에 등장하는 숱한 사람들. 모두 유명한 사람들과 찍은 사진들이다. 그런데 그는 주저 없이 가위질을 해서 얼굴들만 댕강 댕강 오려낸다. 아까워서 도저히 오려내지 못할 사진들을.
“사진을 언제 뒤져보나요. 앨범 놔두고 죽지들 않습니까. 쌓아두면 뭘 해요. 그래서 다 자르는 거에요. 쉬우니까 집에 가서 판대기에다 붙여보세요.”
재미의 그늘은 슬픔이다. 그는 재미있게 몰두하고 있지만 슬퍼 보인다.
“원칙이죠. 반은 슬퍼보이고, 반은 해피해 보이는 거죠. 반반이 항상 공존하는 거예요. 밸런스를 잘 지켜내야죠.”
그는 아트의 위대성은 뭐든지 맘먹기 달렸고 그것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100%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라며.

#여러 우물 파리라
“나는 재수가 좋은 사람이에요. DNA가 나한테는 두 가지가 섞여 떨어졌어요. 동생은 음악만 해서 부산대 음대 교수에요. 그런데 성이 조씨여서 평생 조교수에요. 하하.”
그는 인터뷰 도중 몇 번씩이나 웃음 바다를 만드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는 서울대 음대 중퇴 후 명예졸업장을 받은 가수다. 그리고 화가다. 그래서 화수다. 그는 또 1974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집회 때 성가가수로 노래를 부른 인연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79년 미국 플로리다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신학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가수에 복귀했고 방송에서 ‘체험 삶의 현장’ 등을 진행했다. 지금은 MBC 라디오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를 진행하면서 청취자들의 배꼽을 빼고 있다.
“예술은 밥벌이에요. 미술이나 음악이나 비중 같은 것은 두지 않아요. 돈줄테니 노래하라고 하면 노래하는 거에요.”
가식이라곤 찾을 래야 찾을 수 없다. 그가 고상하지 않고 너무 자유분방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에 비하면 어쩌면 가식과 체면의 덩어리들일지 모른다.
그는 요즘 자꾸 뜨는 분위기가 되니 판을 내자고 제의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새로운 노래 없이 화가한다고 뭐라는 사람들한테 곧 신곡을 소개할 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삶의 형태가 우왕좌왕, 우물쭈물하게 돼 있어요.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잘 결정해서 현명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요. 우리 엄마나 동네 사람들은 음악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나한테 이것 저것 하니 밥 굶고 가난이 물밀듯이 밀려들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비록 여러 우물을 파지만 모든 우물을 잘 파겠다고 이를 악물었어요.”
그의 집은 이미 알려졌듯 청담동 200여평에 이르는 고급 빌라다. 칠십세가 넘은 일해주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그는 할머니 힘들다고 일하지 말라고 한다. 거실에는 검정색 그랜드 피아노가 한대 놓여있고, 손때 묻은 소파와 그가 직접 짜놓은 서랍장이 전부다. 잘 정돈된 그림 도구며 작품들이 놓여있다. 침대 옆에는 기타와 화구가 놓여있고, 발치에는 키보드가 놓여있다. 눈뜨면 작품하고 노래하고 그는 그러며 산다. 서재같은 거실에는 책이 빼곡하다.
“집은 남자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에요. 남자의 권위죠. 삶의 둥지를 마련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나 잘 보면 남자라는 것이 둥지 하나 잘 짓고 죽는 거에요. 집 짓고 오래 살아야 하는데 죽게 되잖아요. 인생은 허무하고 부질없는 거에요. 아둥바둥해서 집 하나 짓고 허리아프고 죽는 거에요. 그나마 나는 앤조이 하면서 사니 재수가 좋은 사람이에요.”
주변에서 집 자랑 하지 말라고 했다며 쉬쉬할 이유가 뭐가 있나, 무슨 죄를 졌나, 탈세를 했나….
그의 9층 거실에서는 한강이 통째로 내려다 보인다. 그곳 작업실에서 그는 허무하고 부질없는 작업에 몰두하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
박숙현 기자 europa@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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