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혹은 너(?)’…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 등록 2007.1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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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나훈아와 닮은 꼴, 패러디 인생 너훈아

   
 
너훈아 인생 10년…”진짜보다 더 힘든 노력들어”
연예생활후 고향에 양로원 짓고 어르신 모실 ‘꿈’


“가수 생활을 5년 정도만 더하고 그만둘까 생각중이에요. 고향에 내려가 양로원 지어서 노인 분들 모시고…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각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 같아요. 세상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며 살고 싶어요.”
강남역 7번 출구.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각자 갈 길을 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다들 한 번 더 그를 쳐다본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나훈아 아냐?” “에이 나훈아가 이런데 왜와” “아냐 나훈아야”.
주위의 관심을 뒤로한 채 반갑게 인사를 마치고 가까운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숍까지 가는 길,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한 번씩 고개를 돌리고 그를 쳐다본다.
이런 관심의 주인공은 바로 너훈아(51). 너훈아씨를 섭외했는데 나훈아씨가 나온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로 기자를 혼란스럽게 했던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모창가수 너훈아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 김갑순에서 너훈아로
근처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다시 한 번 그를 훑어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똑같을까.
그러나 그는 나훈아가 아닌 너훈아. 올해로 너훈아 인생을 산지도 10년이 다 됐다. 흔히 그가 단지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를 닮은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다르다.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에서 태어난 그는 26살, 축산업을 하다 큰 실패를 겪고 서울로 야반도주를 한다.
“7000원을 들고 서울로 상경해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었어요. 노가다부터 중국집 배달까지 한 20여 가지 직업을 거쳤지요, 그런데 올라와서 일 해보니 농사보다 더 힘들더라고요. 당시 힘든걸 말로 하자면 다 표현 못할 정도에요.”
그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생활이었지만 고향부모님에게 효도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힘든 생활을 견뎌냈다.
“어느 날 목욕탕에 갔는데 전부 알몸인 사람들을 보니 사람이 결국은 다 똑같은 거구나 하고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목숨을 걸고 성공하겠다고, 노래를 하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그가 연예활동을 시작한 것은 88년 김갑순이란 이름으로 ‘명사십리’란 음반을 내면서 부터다. 힘들여 번 돈으로 첫 음반을 냈다. 그 당시 가요프로그램이었던 가요톱텐 신곡코너에도 소개된 적이 있고 이후 방송활동도 했던 엄연한 가수다.
“1집 음반을 내고 적지 않은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혼자하다 보니 뒷심이 부족해 얼마 활동을 이어오지 못했어요. 그때는 모창가수 너훈아가 아닌 김갑순으로 활동했어요.”
정식 가수로 데뷔했던 그가 나훈아의 패러디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은 고 김형곤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신림동에서 코미디클럽을 운영하던 그가 나훈아를 모방하면 어떻겠냐고 조언을 했다. 이미 나훈아 닮았다는 얘기를 들어왔던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 클럽에서 전속가수로 공연을 하게 된다. 사실 너훈아란 이름을 지어 준 것도 김형곤이다.
김갑순에서 너훈아로 새로운 제2의 인생의 시작이었다.

△ 나훈아를 닮기 위해
선천적으로 나훈아를 닮긴 했지만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는 나훈아를 닮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머리도 파마를 하고 코도 성형수술로 조금 높였어요. 나훈아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더 닮기 위해서 였죠. 얼굴 표정하나, 손짓하나, 목소리까지 똑같아 지기 위해 정말 힘들게 노력했어요. 한강둔치 맨홀 속에 들어가 발성연습을 했어요. 악취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었지만 그때는 열심히 해야 겠다는 마음뿐이 없었어요”
단순히 나훈아를 닮았다고, 비슷하게 노래를 한다고 그가 처음부터 인기를 얻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짜가 아니라는 이유로 괄시를 받기도 하고 설움도 받았지만 그는 꿋꿋하게 견뎌냈다. 그렇게 남몰래 흘린 눈물만도 한항아리는 될 것이다.
그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모 방송국에서 주최했던 나훈아 모창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부터다.
“시상식에서 진짜 나훈아씨와 나란히 무대에 서는데 참 기분이 묘했어요. 나훈아씨에게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받고나니 더욱 힘이 나더라고요.”
이후 진짜 너훈아의 인생이 시작됐다. 각종 행사장에서, 방송국에서 밤업소에서 출연 섭외가 몰려들었다. 고생 끝에 낙이었다.

△ 쉴틈 없는 바쁜 인생
스스로 일복하나는 타고났다고 자부하는 그는 전국행사장에 공연을 다니느라 쉴 틈이 없다. 지금은 그렇게 많이 방송에서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그가 출연한 방송은 셀 수도 없이 많다.
KBS 사람과 사람 특집, MBC임성훈입니다, SBS 임백천 투나잇쇼, KBS 뉴스투데이, 이경규의 야한밤에 등 알게 모르게 방송에서 그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방송뿐 아니라 영화에도 여러 차례 모습을 선보였다. 긴급조치119와 가문의 위기, 와이키키브라더스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지금은 라디오도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바쁜 스케줄에 어느 정도 형편도 피고 남들보다 부족하진 않지만, 그는 뚜벅이 인생을 살고 있다. 공연장을 오갈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그렇다고 차가 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아예 차가 없다.
“전 차가 없어요. 사실대로 이야기 하자면 면허증이 없는 거죠. 하하. 이동경비라도 아끼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어쩌면 제 얼굴을 더 알리는데 도움도 될 수 있으니까요.”
방송, 영화, 공연 등 바쁜 일상 외에도 그가 맡은 또 다른 직책이 하나있다. 바로 모창가수협회 회장이 바로 그것.
“지금이야 모창가수도 한 분야로 인정해주는 시대가 왔지만 예전에는 모창가수라고 하면 일단 무시부터 했어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얘기처럼 우리도 뭉쳐서 우리 권리를 찾다, 그래서 만들어지게 된 거죠.”
가짜 박상민 사태로 모창가수들을 보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지만 어쩌면 이런 짜가(?)라는 설움이 지금의 모창가수들을 만들어 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고향에 양로원을 짓고 싶어요
가족에 대한 질문에 그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너훈아는 4년 전 가족들을 모두 중국으로 보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된 것. 아이들을 유학 보내면서 한집에 생활하지 못해 마음이 후회스럽고 아프지만 이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일에 몰두하며 잊고 산다.
“3년 전에 아이가 아빠 모창하는 모습이 정말 부끄러웠는데 열심히 하시는 아빠의 모습이 존경스럽다는 말을 했어요. 정말로 가슴이 뜨끔한 순간이었죠. 아이들이 다 컷구나하는 생각도 들었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짜가라는 편견에,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에 힘들지만 너훈아를 보며 박수쳐주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는 쉴 수가 없다.
이런 그가 20년 전부터 꿈꿔오던 소망이 있다. 양로원을 하나 운영하고 싶은 것. 이미 그는 고향에 양로원을 지을 터를 마련해 놓았다.
“가수 생활을 5년 정도만 더하고 그만둘까 생각중이에요. 고향에 내려가 양로원을 지어서 노인 분들 모시고 몸 바쳐 살고 싶어요.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고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각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 같아요. 세상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며 살고 싶어요.”
꿈을 이루기 위해 요즘 들어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그는 이미 외국공연 스케줄로 연말이 꽉 차있다. 12월 4일 일본, 10일 중국 천진, 18일 미국.
빡빡한 일정이지만 가족들을 위해, 꿈을 위해 그는 오늘도 진짜 같은 이미테이션 인생을 산다.
김호경 기자 yongin@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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