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에 살다 -이제남 용인서울병원 이사장

  • 등록 2014.01.20 1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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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돈 없고 몸 아픈 가난한 이웃 챙기기 앞장

   
사람 사는 맛이 나는 병원이 있다.

용인서울병원에 가면 이제남 이사장이 현관에 서서 90도 각도로 인사를 해서가 아니다. 말쑥해 보이고 냉정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늘 사투리를 써가면서 드나드는 사람들과 친근하게 말을 섞고, 이것저것 챙겨주느라 분주하게 오가는 그가 정겹기 때문이다.

돈은 없고 병원비가 많이 나와 발을 동동 구르는 환자 가족이 있으면 병원비를 깎아주라고 참견하지를 않나, 그냥 가고 나중에 갚으라고 말하지를 않나, 직원의 입장에서는 사실 받아들이기 곤란한 이야기임에도 병원 주인은 언제나 힘없고 가난한 환자의 뒤에 서서 가장 든든한 빽임을 자처하고 자신의 뜻대로 관철시키고 있으니 환자와 병원에 웃음꽃이 피는 이유다.



   
마을 사랑방 같은 병원 분위기-10년 넘도록 환자의 문지기 자처

가만 보면, 서울병원에는 환자와 그 가족만 드나드는 것이 아니다. 환자를 태우고 온 택시기사며 간혹 점심을 해결해야 하는 주민들까지 로비 안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자판기에서 무료 커피 한잔과 함께 세상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식당에 가서 공짜 점심으로 마음을 덥히기도 한다. 공짜 커피 마시러 들어가면 어딘지 눈치가 보일만도 하지만 이 이사장은 아예 그런 택시기사들한테 먼저 말을 걸어 거북한 생각이 드는 것을 원천 차단시킨다. “요즘 경기가 어떠세요.” 마치 친구 같다. 병원에 온 가족들에게도 무료로 식사를 제공함은 물론이다.

   
어찌 보면 주민 사랑방처럼 사람들이 북적이는 게 살 맛 나는 세상이 따로 없다.

2002년 6월 용인서울병원 네온사인이 켜진 후, 그러니까 병원 개원 첫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현관문 앞에서 인사를 해온 그의 10여년 세월을 일축해 ‘문지기 경영론’이라는 이제남식 경영 이론으로 부르기도 한다. 병원을 믿고 찾아주는 환자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시작된 이제남식 90도 각도의 인사다.

그도 그럴만한 게 10여년전 용인에 처음 그가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의 모든 것을 반신반의, 아니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오죽하면 120명의 직원을 다 뽑아 놓고도 병원 개원 허가를 내주지 않아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던 나날을 지내야 했을까.

사기에 휩쓸린 병원에다, 건축업자가 병원지어서 권리금 받고 팔을 거라는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악성 루머를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 90도 인사까지 이어지니 당연히 “뭐야, 이건 도대체”라는 곱지 않은 시선과 “그래, 어디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자”라는 식으로 벼름이 있음은 당연하다.

   
사실 문지기 인사는 인사와 친절이 가장 큰 무형의 재산임을 평소 경험에 의해 터득한 바, 그의 가식없는 생활신조이기도 했다.

10여년이 한결 같은 그를 지켜보는 용인 시민들은 이제 그가 용무가 있어서 잠깐 외출이라도 해서 문 앞에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기에 이르렀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당초 그는 용인서울병원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으로 병원을 짓지 않았다. 그는 종합건설회사를 운영하던 건축가로서 병원 건축주한테 건축을 의뢰받았을 뿐이다. 그게 그의 운명을 뒤바꿨다. 그는 보기 좋게 사기에 걸려들어 자신의 생돈 6억5000만원을 쏟아 붓고 월세로 나앉아야 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사기를 당했다는 자괴감으로 집에 고개를 들고 들어가질 못했다.

당시 어두운 동굴안에 갇힌 신세로 전락한 그는 다시 건축으로 재기하면서 5년 동안 멈췄던 용인서울병원을 인수해 자신이 직접 경영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지하 1층, 지상 6층의 병원을 올려 세울 수 있었다.
의사도 아니었고 완전히 병원 일에 문외한이던 그에게 병원 운영은 하나부터 열 까지 어려움 아닌 게 없었다. 의사를 뽑는 일부터 고가의 병원 의료 장비를 사 놓는 일까지 하나도 쉬운 일이 없었다. 고립무원인 그는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기도 많이 했다.

   
그는 그 당시까지 인생 자체가 고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다하며 어렵게 일어섰던 것이기에 그의 시련에는 눈물과 동정이 따른다.

그는 완도군 고금면, 바다 한가운데 섬인 고금도 출신이다. 너무도 가난했던 그는 12살 초등학교시절부터 뱃일, 뭍일 가리지 않고 노동을 해야 했다. 그는 스스로를 상머슴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첫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노를 저으며 김을 뜯고, 김발을 놓을 말뚝을 개펄에 박고, 이른 봄 미역을 베는 일까지 손이 얼어터지는 게 아니라 그의 마음이 얼어 터지는 생의 무게를 견뎌내야 했다.

남들이 다 가는 중학교에도 가지 못한 채 그는 책가방 대신 아버지가 그의 몸에 맞게 만들어준 지게를 지고 김을 나르고 나무를 날라야 했다. 수박을 먹고 싶어 하는 그에게 물 한주전자를 다 마시면 사주겠다는 어머니 말씀대로 한주전자의 물을 마시다가 된통 체해 요즘도 수박을 잘 먹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모든 걸 포기한 채 그대로 살았겠지만 그는 인내와 초월, 그리고 공부와 성공에 대한 집념과 열정으로 끓어올랐다. 결국 그는 고학생으로 온갖 노동과 시련을 겪으며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입학해서 학문의 꿈을 이뤄냈다. 또한 대학시절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사판에서 노동을 했던 경험으로 건축 일을 시작해 성공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건축으로 잘 벌던 그가 아무리 사기를 당했어도, 하루아침에 병원 운영으로 선회를 한 것은 어린시절 병원하나 없던 그의 고향마을,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 때문이다. 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시골에 병원이 없던 관계로 한 맺힌 삶을 마쳐야 했다. 마찬가지로 87세의 장수를 누린 할머니도 젊은 시절 손목 탈골을 평생 고치지 못한 채 돌아가시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의사가 돼서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병원을 운영하는 기회가 온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배곯고 못 먹어서 한이 된 시절을 생각해 그는 월간 수입 총액의 일부를 떼어 지역사회 불우이웃에 대한 봉사에 늘 앞장서고 있다. 10여년을 한결같이 불우한 독거노인, 요양시설, 소외계층에 대한 쌀, 김장 지원과 이들에 대한 무료진료 및 수술, 무연고자 무료 장례사업 등의 지원을 빠뜨리지 않는다. 또 용인 지역 및 고향 전남 완도 고금면의 중고교에 장학금 전달도 빼놓지 않는다. 그는 지금 당장의 봉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난하고 없는 자는 한시가 급한데 조금이라도 있는 자가 도울 시기를 저울질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병원의 법인명은 효심이다. 무엇보다 효를 중시하겠다는 생각, 벌면 베풀고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서 지은 이름이다. 그는 주거와 각종 위락시설을 갖추고 질병치료부터 장례와 화장까지 일관 시스템을 갖춘 최고의 실버타운 의료센터를 만드는 꿈을 갖고 있기도 하다.

여전히 첫 새벽부터 달리고 또 달리는 그는 “아! 용인서울병원 이사장이 문지기를 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름다운 자신의 인생이라고 말한다.
박기정 기자 기자 pkh45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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