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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정원이 들려주는 침묵의 언어들

이미상(시인)

 

[용인신문] 지난가을에 심은 수선화 구근이 봄에 꽃을 피웠다. 이어서 프리지어, 마가렛이 피었다. 뒤이어 애니시다가 불꽃처럼 노란 꽃을 터뜨렸다. 겨우내 말라 죽은 줄 알았던 백리향도 줄기 끝에 보랏빛 꽃망울들이 달려있다. 꽃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다. 이제 곧 라벤더도 보랏빛 꽃을 피울 것이다.

 

이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정원은 더위에 허덕이다가 입추 무렵 샤프란꽃이 필 것이다. 흰 꽃 샤프란은 첫아이가 뱃속에 들어설 때부터 함께 한 이 정원에서 가장 오래된 꽃이다. 그다음으로 오래된 동반자 꽃기린은 한겨울에도 작은 붉은 꽃을 매달고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올리브 나무, 유칼립투스, 율마, 로즈마리 등 나의 베란다 정원에는 꽃나무들과 허브가 자라고 있다. 그러나 이 정원에 내가 좋아하는 꽃나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싫어했던 홍콩야자가 있다. 20년 전에 남편이 여직원에게 선물 받아왔는데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을 버릴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키웠다. 손가락만 했던 나무가 어느덧 허리까지 자랐다. 굵고 단단한 나무를 가지치기하고 삽목을 하여 지금은 홍콩야자가 세 그루가 되었다. 물도 안 주고 방치하고 괄시했는데도 잘 자라준 홍콩야자, 20년이 되어서야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내 곁에서 함께 하며 결국 사랑하게 된 것들. 반면 특별히 애지중지하며 정성을 쏟았지만 실패한 것들도 많다. 무화과가 그렇고 미스김라일락, 보스턴고사리, 테이블 야자, 셀렘도 그렇다. 남들이 키우기 쉽다고 하는 것인데 나는 실패하여 곁에 두지 못한 것들이다. 잘 지내보려 했는데 뭔가 나랑 맞지 않아 떠나보낸 것들. 베란다 정원을 가꾸면서 알게 된다. 무조건 애쓴다고 다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원로 여배우의 인터뷰가 요즘 부쩍 떠오른다. 나이 들어갈수록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된다고 그녀가 말했었다. 사람들 만나면 말실수를 하게 되어서 두렵다고 했다. 요즘 나도 그렇다. 얼마 전 오랜 친구들과 단톡방에서 정치 얘기가 오간 적이 있다. 오랜 친구들이라도 의견이 달랐다. 아니 나만 달랐다. 하여 나 때문에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서로 신나서 친구들끼리 얘기가 오가는 중에 나 혼자 불쑥 다른 의견을 말한 것이다. 그때 찾아든 정적. 나는 바로 후회했다. 단톡방 분위기를 내가 깬 것이다. 친구들이 저기 멀리 멀어짐을 느꼈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물에 뜬 기름이었음을 느꼈다.

 

온 정성을 다했는데 떠난 꽃나무들은 그들 탓이 아니다. 내가 그들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부하고 정보를 얻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물과 바람과 햇빛을 내가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내 식대로 애정을 쏟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살아가는 일도 그러하다. 자식을 키우는 일도 그렇고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다. 내가 사랑했지만 나를 떠난 사람들. 반면 내가 마음 쓰지 않아도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정원처럼 뭔가 틀어져 미워하게 된 이들보다 곁에 남아있는 사랑이 훨씬 더 크다. 실패한 인연들에 대해 상처받지 않으리.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게 되면서 나의 정원은 더 풍성해졌다. 아직도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은 세상이지만 나는 꽃과 나무들이 말하는 언어들을 듣는다. 황금시대 우화들에서 인간은 동물들과 꽃과 나무들의 언어를 알아들었다고 한다. 이제 인간은 같은 말을 하면서도 알아듣지 못한다. 어제는 로즈마리 새순을 뜯어 차를 만들었다. 나는 홀로 정원이 들려주는 침묵에 귀 기울이며 향긋한 차와 함께 세상의 봄날을 기다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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