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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사유(私有)화 한 자의 최후는…

오룡(평생학습교육연구소 대표/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용인신문] 고려 의종 때의 무신 이의민은 키가 8척이나 되는 거구였다. 고려사에 기록된 이의민은 “젊은 시절 고향 경주에서 형들과 함께 나쁜 짓만 일삼던 건달이었다.”라고 한다. 이의민은 안찰사 김자양의 추천으로 경군(京軍)에 발탁되었다. 경군에 들어간 이의민은 수박희(手搏戱)를 잘해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무신정변에 가담한 공으로 중랑장에 오르더니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상장군에 올랐다.

 

권력을 잡은 이의민은 본성을 드러냈다. 뇌물을 받고, 여러 민가를 빼앗아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백성의 논밭도 수시로 빼앗곤 했다. 그의 아내 최 씨의 성격도 모질고 포악했으며 음란했다. 세 아들 지순, 지영, 지광도 제멋대로였다. 이지영과 이지광 형제는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렸다.

 

권력에 취한 이의민은 급기야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한 듯하다. 이의민은 ‘십팔자(十八子)가 일어난다’라는 도참설과 풍수지리를 자신과 결부시켰다.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를 부흥시킬 마음을 품은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의민은 까막눈에다 무당을 몹시 신봉하였다. 그의 고향 경주에 나무로 만든 귀신 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두두을(豆豆乙)’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은 자기 집에다 사당을 짓고 그 귀신을 가져다가 날마다 제사하면서 복을 빌었다.”라고 한다.

 

13년 동안 권력을 사유화한 이의민은 1196년 최충헌 형제에 급습을 받고 무너졌다. 최충헌은 이의민의 3족을 멸하고 도당들과 노예까지 다 잡아 죽였다. 도망쳤던 이지순과 이지광이 돌아와 잘못을 빌었는데 최충헌은 “네 놈들이 화근이니 용서하지 못한다.”라며 모두 죽였다.

 

이지영도 해주에서 잡혀 죽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백성들은 “이지영이 죽었으니 우리는 이제 걱정이 없게 됐다.”라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는 정시에 도착했다.” 일당 독재를 주장하며 지배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한 파시즘의 프로파간다였다. 변절한 언론인이었던 무솔리니는 ‘결속’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결속’은 배타적 결속을 의미하며 이는 엘리트에 의한 통치, 민주주의 반대를 의미한다.

 

무솔리니의 도어스테핑도 일관성이라는 게 없었다. 너무 단순했고 무식했다. 기자로서 현장을 누비고, 주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던 헤밍웨이에 의하면 “기자들 앞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읽던 책이 위아래가 뒤집힌 프랑스어-영어 사전이었다.”라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무솔리니에게 철학 따위는 없었다. 단지 그럴듯한 말뿐”이라고 말했다. 극좌에서 극우로 변신했고, 코스모폴리탄이었다가 국가주의자가 된 무솔리니에게 고정된 신념은 없었다. 신념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불쏘시개였다.

 

무솔리니의 권력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로 유지되었다. 검은 셔츠, 로마식 경례, 원수 군복 등에다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유의 웅변술.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라고 큰소리쳤다. 거기까지였다.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파시즘의 에너지였다. 파시즘은 공정의 상징이 되었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파시즘에 환호했다. 무솔리니가 집권한 21년 동안에도 이탈리아의 기차는 정확히 운행되지 않았다.

 

결국 파시스트 중에서도 배반자가 나왔다. 1943년 7월, 파시스트 평의회에서 측근들이 앞장서서 무솔리니를 당수에서 끌어내렸다. 권력을 잃은 그를 위해 나서는 이탈리아인은 아무도 없었다. 1945년 4월, 스페인으로 탈출하려던 무솔리니는 유격대에 잡혔다. 즉시 처형된 무솔리니의 시체는 밀라노로 보내져, 로레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오래된 사족 ; 1232년, 김윤후는 말했다. “내가 적장을 죽이지 않았다.”라며 고려조정과 최우가 주는 상장군의 벼슬을 거부한다. 그는 권력자이기보다 처인의 부곡민이길 원했다.

 

※최근 사족 ; 2022년, 대통령은 말했다.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나. 다른 정권 때와 한번 비교를 해보시라. 사람들의 자질이나 이런 것들을.”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집권당이 가장 많이 쏟아낸 말은 ‘공정과 상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