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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0 |잘 익은 사과 |김혜순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0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을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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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가까이서 잘 익은 사과향. 당신에게 여치와 자전거 바퀴, 그리고 보랏빛 바람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요.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사과는 익어가고 가을은 깊어만 갑니다. 잊고 있었던 우주율을 느끼는 요즘. 이 순간 우리는 한 송이 구름을 바라보고 있어요. 어쩜 손등을 가만가만 덮어주는 구름이라니요. 영원히 아가인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모든 만물에 숨결로 깃들어 있을 것. 문득 자전거 바퀴의 싱싱 씽씽 소리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나갈 때, 사과 한 알 조용히 깎이고 있습니다. 어느 마을 구멍가게 평상 위 할머니 이야기이지요. 우주의 절기에 찾아든 노망도 무색하게, 홍조 띤 뺨을 가진 그녀가 그 주인공 입니다. 이렇듯 오래된 미래는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요. 숟가락으로 파낸 사과를, 아가처럼 잇몸으로 오물거리는 저 풍경 한 채.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