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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기행문-영주 부석사


영주 부석사에서는 색() ()이 존재한다.

가장 오래된 서원이 있다. 서원보다 오래된, 아름다운 절도 있다

 

부석사 근처에 소수서원이 있다. 은은하고 가지런하며 소박한 풍광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서원이다. 소나무 숲속은 화보(?)를 찍으면 좋겠다. 산림욕을 하고 싶다.’는 말들이 나올 정도로 상쾌한 피톤치드를 느낄 수 있다. 서원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경쾌했다. 물가에 세워져 있는 겸령정곳곳에 걸려있는 문장들은 공부보다는 휴식하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1543,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은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성리학을 들여온 문성공 안향이 살았던 곳을 기리고,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함이었다. 최초로 세워진 백운동 서원은 퇴계 이황에 의해 1550년에 소수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1868년에 살아남은 47개 서원중의 하나다.


순흥(順興) 들판을 가로질러 늦은 오후 무렵에 부석사에 도착했다. 작렬하는 태양은 작은 나뭇잎하나 말리지 못할 정도로 여름의 소백산맥은 강렬한 초록의 군상(群像)이었다.


일주문에서 올려다 본 범종루는 아득했다.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아홉단 석축 돌계단의 마지막인 상품단(上品壇)이다. 안양루에서 보이는 석등은 관음보살의 빛을 뿜어주듯 미려(美麗)하고, 단아(端雅)했다.


초록색 바다위에 떠 있는 여름의 무량수전은 선()과 속()이 하나로 융합된 경전(經典)의 공간이다. 여기는 9품의 상품상생(上品上生) 극락의 마당이다. ‘하나가 전부이며, 전부가 하나,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인 화엄의 세계이다.


무량수전안의 아미타소조여래좌상은 발아래 산하를 정면으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지혜와 자비의 아미타불은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바라본다. 통일신라 불상의 근엄한 자태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고려 초의 온화한 미소는 보일 듯 말 듯하다. 현존하는 최고 건축물.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다시 지은 국보 18호 무량수전이 보호해주는 국보 25호 아미타불은 화엄사상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무량수(無量壽)로 존재할 것이다.


무량수전 앞 마당에서 내려보는 소백의 준령은 질주하는 초원의 말 떼처럼 동해를 향해 달려가는 형세이다. 말 밥굽소리 요란하던 최전선(戰線)에 세워진 화엄의 종찰은 천년이 넘도록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니 영겁(永劫)의 사찰이다. 의상은 한 평생 옷 세벌과 물병 한 개와 밥그릇 하나 외에는 지닌 게 없었으니 경제적으로 욕심도 없다. 그런 그가 이 땅은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하여 참으로 법륜을 굴린 만한 곳이다. 화엄은 이처럼 선하고 복 받은 땅이 아니면 융성할 수가 없다라고 전하는 <송고승전>을 보면 부석사 건립을 위해 정치적인 셈법을 한 것일까. 여하튼, 의상은 정치적이다. 아니 의상은 정치적인 계산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속세의 범부(凡夫)들은,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676년에 문무왕은 당나라를 몰아냈다. 당나라에서 돌아 온 의상은 왕명으로 부석사를 세웠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선묘는 당나라의 여인이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떠난 의상은 상선을 타고 등주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 선묘는 의상의 공부를 뒷바라지 하였다. 이후 의상은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돌아왔고, 선묘는 의상이 떠난 바닷가에서 빠졌으나 용이 되었다.”


원효는 애인으로 삼고 싶었던 요석공주의 집으로 찾아가 아들을 낳았으나, 의상은 애인을 하고 싶어 제발로 찾아 온 선묘를 돌려보냈다. 오룡은, 부처의 세계에 존재하는 상수(上手) 고승들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하수(下手)의 삶을 살고 있는 오룡은, 살아서 사랑을 이룬 요석공주보다 죽어서야 의상의 사랑을 얻은 선묘의 삶이 기구(崎嶇)해서 위로하련다.


화엄의 세계에선 삶과 시간과 공간의 설정을 철거해 버렸다 해도, 사랑은 절절함과 애틋함만이 아닌 지지고 볶는 것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살아난다. 그러므로 일연 스님이 온 솥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충분하다.”라고 생각하며, 선묘의 희생(?)을 불심으로 기술한 부분에 대해 이의 있습니다라고 한들 어떠하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최순우를 기억한다. 스님도, 사람도 드문 드문, 한적한 무량수전 앞에서 홍건적을 피해 허겁지겁 도망나온 공민왕을 연민한다. 선묘각과 조사당의 오래된, 호젓한 숲길에서 만날 것 같은 대사와 낭자를 상상하며 한참동안 머뭇거렸다.


화엄일승법계도에서 의상이 말한대로, ‘법성(法性)은 원융(圓融)하여 두 모습이 없고, 제법(諸法)은 부동(不動)하여 본래 고요하다는 부석사의 여름은 여유로웠다.


서방정토가 따로없고 극락이 여기인 듯, 오늘은 마땅히 속세에서 어느정도 비켜서 있는 날이다.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소장, 평생학습교육연구소 대표)


공민왕이 쓴 것으로 알려진 무량수전의 현판과 배흘림 기둥은 사진찍기에 최적의 배경이다.


중품계단에서 올려다 본 부석사 안양루 아래로 국보 17호의 아름다운 석등이 보인다.


소수서원 가는길에 있는 소나무를 보면 카메라를 꺼내들게 된다.


백운동 서원과 소수서원의 현판이 함께 걸려있는 강학당은 배흘림 기둥과 사방으로 툇마루가 있어 시원하게 보였다.<용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