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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리다

박소현(작가)

 

[용인신문] 한 대기업 홍보영상을 의뢰 받고 사전 인터뷰를 위해 홍보실을 찾았다. 홍보실 과장은 여직원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커피 심부름은 그 당시 여직원들의 당연한 임무였다. 게다가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다’등의 발언은 예사였고, 노래방에서는 술에 취한 척 블루스 음악을 선택한 후 여직원들을 무대로 불러내던 때가 있었다. 20년도 더 지난 과거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 사회적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을까. 커피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는 것 같다. 그럼 회식 자리에서 자주 하던 직장 상사의 성희롱적인 멘트는 사라졌을까? 이제는 멘트를 하고, “아 이 말을 하면 고발당할 수 있겠다, 취소, 취소,” 라는 말을 오히려 덧붙인다. 누군가의 용기로 시작된 ‘미투 운동’이 직장 내에서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무엇이 맞는지 모르겠다.

 

누구보다 여성의 인권을 위해 앞장섰던 유명 인사가 세상을 달리 했다. 피해자의 고발만 남긴 채 진실이 죽음 앞에 표류하고 있다. 영정 사진 앞에서 정치적 논쟁이 일어나고 ‘미투’ 논란과 조직 내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죽음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조차 편 가르기를 하며 비난을 받는다. 너무 한 쪽으로 몰아가는 위험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왜 지금까지 참다가 이제 와서’라고 말한다. 피해자가 참기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소극적 방법으로 부서 이동을 요구했지만 묵인된 것 같다. 왜 아무도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실수’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그것을 실수라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사회의 분노인 것 같다.

 

문득 한 번이라도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 피해자가 내 딸이라면, 만약 내 딸이 직장 상사에게 그런 문자를 받는다면 그래도 딸에게 이해하라고 말할 아버지가 있을까 싶다. 고인을 수행하던 수많은 사람에게는 당연히 가족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내 딸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가족인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녀가 요청했던 부서 이동에 조금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젊은 체육 유망주도 어처구니없는 묵인과 침묵 속에 목숨을 잃었다. 죽음은 그녀의 마지막 절규였다. 그녀도 죽기 전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후에 세상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그렇게 절실히 도움을 요청했다. 한사람이라도 그 도움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면 목숨이라는 큰 대가를 치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 세상은 누군가의 죽음이나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일까, 아동학대도 세상을 분노하게 했던 ‘미투’ 사건도 여전히 세상 속의 뉴스로 끊임없이 등장한다.

 

죽음 앞에서 가해자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권이나 정치 성향을 위한 목적이 아니기를 바란다. 오롯이 피해자를 위한, 세상의 잘못된 것을 향한,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비판과 호소의 목소리이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도 틀리고 그때도 틀렸던 잘못된 행동 앞에 왜 죽음이라는 안타까운 대가가 계속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지 않아도 언제든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호소할 수 있는 안전한 제도부터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가해자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세상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피해자의 작은 목소리도 크게 들을 수 있고 외면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절실하다. 입 보다는 두 귀가 더 크게 열려야 할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