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 최지인 너와 손잡고 누워 있을 때/ 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세계의 끝은 어디일까/ 수면 위로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빛바랜 벽지를 뜯어내면/ 더 빛바랜 벽지가 있었다// 선미에서 네가 사라질까봐/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컹컹 짖는 개를/ 잠들 때까지 쓰다듬고// 종이 상자에서/ 곰팡이 핀 귤을 골라내며//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기도했었다// 고요했다/ 태풍이 온다는데//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최지인은 1990년 경기도 광명에서 태어났다.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나는 벽에 붙어 잤다』가 있다. 「죄책감」은 너와 손잡고 있는 것이 죄책감이고 이 세계의 끝을 생각하는 게 죄책감이고 오래된 벽지가 죄책감이고 선미에 선 너를 보는 게 죄책감이고 개를 쓰다듬는 게 죄책감이고 곰팡이가 핀 귤을 골라내는 게 죄책감이고 나를 내가 미워하지 않는 게 죄책감이고 기도 하는 게 죄책감이고 고요한 게 죄책감이다. <창비> 간 『일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중에서. 김윤배/시인
느끼고 힘을 준다는 것 김유림 산삼을 닮은 당근 조형물을 보고 있었지.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당근 조형물이 로터리에 있다는 걸 늘 확인하고 싶다. 버스는 엄청 빨리 달렸고 집에 도착하니 8시였다. 김유림은 199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6년 『현대시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녀의 이번 시집의 특징은 자신의 이름을 시 속에 수없이 넣었다는 것이다. 상상력은 발랄하고 독창적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시를 읽는 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요즘 젋은 시인들의 난삽함이 없다. <창비> 간 『별세계』 중에서. 김윤배/시인
능금 박성룡 가을을, 듣고 있었다 지금 저기 저렇게 살벌한 나뭇가지에 익어 있는 (마치 –어디론가 멀리 기울어만 가는 태양의 마지막 수확처럼 가지 끝에 익어 있는) 저 향 짙은 체중에 귀를 기울이고 뵈는 것보다도 더 많은 가을을 듣고 있었다 ....맨 처음엔 몹시도 가까운 거리에서 마구 설레는 일진의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다음엔 그 바람소리가 쓸리는 대로 흩어지는 무수한 나뭇잎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마지막에 하나의 크낙한 종이 내는 음향과 같은 해맑은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왔다 박성룡(1934~2002)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55년 시 「화병정경」으로 문단에 나왔다. 「능금」은 능금이 익어가는 가을의 풍경을 노래한 시편이다. 능금은 기울어만 가는 태양의 마지막 수확처럼 가지 끝에 익어가는 중이고 화자는 향내를 맡으며 가을을 듣고 있다. 바람소리가 들리고 흩어지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오고 커다란 종소리가 들려온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중에서. 김윤배/시인
실바람 김윤성 겉으로 평온하고 순간으로 무사한 이 조용한 봄날 아침 천사들은 아직 명상에만 잠겨 있을 때 이유와 더불어 한 오리 실바람이 불어 온다 흩어졌다 다시 모여드는 새의 무리처럼 쾌감의 저쪽에서 되돌아오듯 숨을 길을 따라 원래의 얼굴 그대로- 오직 한 사람만이 눈을 뜨게 된다면 네가 바로 그 한 사람이 되리라 김윤성(1926~2017)은 서울에서 출생했다. 광복 직후 정한모 구경서 등과 동인지 ‘백맥’을 창간하여 해방문단에서 활동 했다. 계성보통학교 6년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독학으로 시 공부를 했다. 「실바람」은 봄날 아침의 요요로운 정적을 타고 불어오는 실바람을 노래한 시다. 그러나 실바람은 격정적인 이미지를 거느리며 죽음과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본다. ‘눈을 떠라 죽음을 지닌 생명의 빛, 집요한 준엄이여!’라고 봄의 생명과 죽음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 때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게 된다면 네가 그 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외친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중에서. 김윤배/시인
설화雪花 김남조 여긴 외로운 인습의 사막인데 그나마 별빛을 피해 나무그늘에 울던 애상의 마을인데 불 켜지듯 환히 눈도 부셔라 눈이여 신의 지문이나 찍혔을까 도무지 무구한 백자의 살결에 수정의 차가움만이 상기도 겹겹이 적시며 있으려니 이러한 날에 솔바람 이우는 산곡 얼어붙은 옹달샘을 찾아가면 거기서 잃어버린 이의 얼굴이 비쳐나 있을까 서성대며 머뭇거리는 고독한 영혼 (.....) 아아 눈뿌리 타는 더운 눈물을 뿌리면 설화는 거두어 하늘에 다시 피리라 김남조 시인은 1927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올해 나이 95세다.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잔상」을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설화」는 눈 온 아침의 풍경을 노래한 연시다. 인습의 사막에 내린 흰 눈, 애상의 마을에 내린 흰 눈은 눈부시다. 저 희고 순결한 눈 위에 신의 지문이 찍혔을지, 수정의 차가움이 겹겹이 백자 같은 살결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산곡 얼어붙은 옹달샘을 찾아가면 거기에 잃어버린 이의 얼굴을 만날지 몰라 서성이는 화자는 고독한 영혼이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중에서. 김윤배/시인
너는 나의 혁명 고원 그늘은 태양이 갈망에 겨운 세월 위에 던지는 씨니씨즘이었다 그늘 속에는 이름만의 공화국처럼 서운한 얼굴들이 그날그날 휴식을 취하는 풍속이 있었다 도피와 굴욕의 창백한 그늘에 엎뎌 처참한 숨소리가 어느 식민지 유행가를 닮아갔고 이따금 비라도 내릴 때면 서글픈 자기기만을 위안 삼았다 비굴한 고독이여. 그러나 태양은 그늘이 끝내 갈망의 머리를 드는 표적이었다. 뜨거운 가슴 파아랗게 트인 나의 사랑 자유의 해변에서 너는 내 보람을 영도하는 것이었다 -너는 나의 혁명이었다 고원 (高源, 1925 ~ 2008)은 재미동포 시인이다. 본명은 고성원(高成源)이며,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587번지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196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석사과정을 마쳤다. 1970년에 한국 현대시를 영어로 번역하여《Contemporary Korean Poetry》라는 책으로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너는 나의 혁명」은 식민지인 조국에 바치는 헌시다. 식민지 지식인의 냉소주위와 그늘에서의 삶을 드러낸 이 시편은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며 끝내 너는 나의 혁명이라고
봄산 문태준 쩔렁쩔렁하는 요령을 달고 밭일 나온 암소 같은 앞산 봄산에는 진달래꽃과 새알과 푸른 그네와 산울림이 들어와 사네 밭에서 돌아와 벗어놓은 머릿수건 같은 앞산 봄산에는 쓰러진 비탈과 골짜기와 거무죽죽한 칡넝쿨과 무덤이 다시, 다시 살아나네 봄은 못 견뎌라 봄은 못 견뎌라 문태준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봄산」은 봄의 정취가 물씬한 시편이다. 시인에게 봄산은 쩔렁쩔렁, 요령을 달고 밭일 나온 암소 같은 산이다. 그런 봄산에는 진달래와 새알과 그네와 산울림이 들어와 산다. 봄산에는 쓰러진 비탈과 골짜기와 거무죽죽한 칡넝쿨과 무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봄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창비 간 『이침은 생각 한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날개뼈 조온윤 네가 길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네 몸보다 작은 것들을 돌볼 때 가만히 솟아오르는 비밀이 있지 태어나 한번도 미끄러진 적 없는 생경한 언덕 위처럼 녹은 밀랍을 뚝뚝 흘리며 부러진 발로 걸어가는 그곳 인간의 등 뒤에 숨겨두고 데려가지 않은 새들의 무덤처럼 조온윤은 1993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되며 작품 활동 시작했다. 문학동인 《공통점》으로 활동 중이다. 「날개뼈」는 쉽게 읽히는 시는 아니다. 그만큼 중의적이라는 의미다. 화자는 지금 길에 버려진 죽은 새의 날개뼈를 보고 있다. 날개뼈는 새의 몸이어서 새보다 작은 것들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새에게는 비밀이 있는 것이다. 비밀은 한번도 미끄러진 적 없는 생경한 언덕처럼 위태로운 곳이기도 하고 밀랍을 흘리며 부러진 발고 걸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 비밀스런 장소는 인간의 등 뒤에 숨겨두고 데려가지 않은 새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창비 간 『햇빛 쬐기』 중에서. 김윤배/시인
우리가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 최백규 지난 일이다 옥상 한가운데 서 있으면 멀리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려온다 늙은 내가 앉아 있을 서울행 열차를 향해 어린 내가 대구 육교 위에서 친구들과 돌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 이만한 크기였을 것이다 머리 위 비행기 항로를 틀었다 봄은 멀고 하늘도 높아 눈발이 날릴까 최배규는 1992년 대구에서 태어나 명지대학교 문창과를 졸업했다. 2014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시단에 나왔다. 창작 동인 ‘뿔’의 멤버이며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가 있다. 이번 시집이 그에게는 첫 시집이다. 「우리가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은 회고지향의 그림이 보이는 작품이다. 첫 행이 ‘지난 일이다’로 시작된다. 과거를 돌아보는 자세다. 옥상에서 화자는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 노는 소리를 들으며 서울행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기억을 소환한다. 어려서 아이들이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 달리는 열차만한 크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리 위로 날아가던 비행기가 항로를 틀었다. 아직 봄은 멀고 하늘도 높아 눈발이 날릴지 모른다. 창비 간 『네가 울어서 꽃이 핀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거울 임선기 거울을 들여다봤지만 나를 본 적이 없네 나를 본 적 없으니 거울은 진실이군. 그래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준 거울의 관대함이여! 거울은 원래 물이었다지 물만한 거울 어디 있으랴 임선기는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났고 1994년 『작가세계』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은 『호주머니 속의 시』였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거울」은 언어의 극한에 오래 머물다 돌아온 시인의 작품답게 차고 시리며 명징하다. 거울 속에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고백은 자신의 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자탄의 목소리다. 외형으로 보이는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이다. 그게 거울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신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일부라도 보여준 거울은 관대하다. 따지고 보면 거울 이전의 사람들은 물속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것으로 거울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러니 물 만한 거울이 어디 있겠는가. 창비 간 『피아노로 가는 눈밭』 중에서.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