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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참 선비의 표상 ‘류희’

김성태 경기문화재단 수석연구원

용인시 모현읍 왕산리 산85번지에 자리한 류희의 무덤.

 

류희의 저서로는 『문통』(文通), 『언문지』, 『시물명고』(詩物名考), 『물명유고』(物名類考) 등이 있다.

 

[용인신문] 용인의 역사 인물 중에서 문화관광부 ‘이달의 문화인물’, ‘동아시아 실학사상가 99인’에 선정될 정도로 학문적 업적이 매우 탁월하지만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다. 바로 모현 마산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일대에서 보낸 서파 류희(柳僖, 1773 ~ 1837)이다.

 

본관은 진주(塵洲). 초명은 경(儆). 자는 계중(戒仲). 호는 서파(西陂), 방편자(方便子), 남악(南嶽)등이다. 아버지는 목천현감을 역임한 류한규(柳漢奎)이며, 어머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태교 책 『태교신기』를 지은 사주당이씨이다.

 

역산(曆算)과 율려(律呂) 등 자연과학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를 닮아 어려서부터 구장산법(九章算法)을 익혔고, 역리복서(易理卜筮)를 통달하였다. 여성이지만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사주당이씨의 영향으로 성리학에 정통하고, 주자학을 학문의 본령으로 삼았다.

 

타고나면서부터 영특하여 4세에 한자의 뜻을 알고, 7세 때 『성리대전』을 통독할 정도로 타고한 영재였다. 1791년(정조 15)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말고 타고난 본성을 지키고 살라는 모친의 뜻을 받들어 향촌에 묻혀 살면서, 농사·의술·풍수·대필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가 53세 되던 해인 1825년(순조 25) 누이의 간곡한 부탁으로 생원시를 합격하고, 1830년(순조 30) 황감시(黃柑試)로 대과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나 응시를 포기하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포의(布衣) 또는 한사(寒士)라는 관칭(冠稱)이 늘 따라다닌다. 어쨌든 그는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100여 권의 거질(巨帙)을 남긴 조선의 몇 안 되는 ‘산골 농부 학자’였다.

 

그는 조선후기 최고의 정음학 연구서로 칭송받는 『언문지』를 남긴 국어학자이며, 우리말 어휘연구에서 가장 귀중한 서적으로 인정받는 『물명고』를 지은 박물학자이자 어휘학자이다. 고경(古經) 연구에 전력하여 『춘추』 연구에서 최고의 연구 결과를 낸 훌륭한 춘추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글에는 철저한 사료 비판, 풍부한 고증, 치밀한 논증, 구성의 완벽함 등이 돋보인다. 그래서 조선의 대표적 고증학자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한편, 그는 기존의 경전이나 성현의 주장을 묵수(墨守)하지 않고 실증(實證)을 통하여 진리를 밝혀가는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태도를 지닌 실학자이기도 하여, 동아시아 실학사상가 99인에 선정되었다.

 

현재 그의 『문통』 중 학술적 가치가 높은 분야를 선별하여 영인본이 간행되어 보급되었고, 『문통』과 서파의 학문세계를 다룬 각종 학술대회가 전문학술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더하여 박사논문 2편, 석사논문 1편, 전문학술논문 70여 편이 발표되었다. [언문지]와 [물명고]가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며, 최근 그의 산문을 선별하여 번역한 [산골 농부로 태어난 책벌레](글을 읽다 출판사, 2022)에 번역 출간되었다. 어쨌든 이런 그에 대한 연구 성과는 그의 학문적 업적을 대변해 주고도 남는다.

 

류희의 이런 학문적 업적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분야는 우리말에 대한 연구이다. 그는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드물었던 시대에, 『언문지』에서 풍부한 고증과 치밀한 논증을 통하여 표음문자로서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였다. 또 한자음뿐만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도록 시도하였다. 그와 함께 한글이 몽고문자에서 나왔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국어학계는 서파의 한글 연구를 두고, 이전의 한자음 위주의 연구를 극복해 처음으로 우리말 위주로 연구를 시도한 것으로, 조선시대 국어학 연구서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 평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희승은 “다른 저서와 바꿀 수 없는 주옥”이라 평가했다. 김운경은 “조선 문자사 상에 있어서 대서특필할 권위 있는 학자를 들라면 제1인자로 류희를 들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으며, 최현배는 “신경준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했다.

 

류희의 또 다른 국어사적 공헌은 어휘사전인 『물명고』의 저술이다. 이 『물명고』에는 여러 가지 사물을 한글과 한문으로 풀이하였다. 한글로 풀이된 표제어가 모두 1660여 개에 달하여, 당시 국어 어휘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류희는 참 선비 즉 진유(眞儒)였다. 그는 도에 뜻을 두고, 지조를 지키면서, 안빈낙도와 청한(淸寒)의 삶을 살았다. 행동에 염치가 있었으며, 탐욕을 멀리했다. 또 학식이 높았고, 천리와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학자였다. 아울러 유교적 도덕 규범을 지키면서 곧고 올바르게 살았다. 한편, 조선후기 과거시험공부가 의리를 밝히는 도학공부와 심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도학공부에만 전념하는 고상한 선비의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신념을 한 시대만이 아니라 만세에 전하고자하는 의무감도 있었다. 그야말로 유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현하고자 평생을 노력하였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류희가 100여 권의 다작을 저술하고, 『언문지』 등 걸작을 다수 남긴 데에는 그의 문장벽과 독서량, 그리고 탐구욕이 한 몫을 했다. 그는 한마디로 엄청난 독서광이면서, 미친 듯이 글쓰기를 좋아했고, 의문이 생기면 끝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뿐만 아니라 지적 호기심이 대단하여 두루 통달하고자 애썼다.

 

그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는데, 이는 그의 문학관에서 돋보인다. 18세기 이후는 정조가 문체반정을 강행할 정도로, 우리 문단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난무하였다. 특히 중국 서적의 유입으로 소설이나 명ㆍ청의 소품문(小品文)이 크게 유행하여 많은 이들이 거기에 열광하였는데, 서파는 이러한 세태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서파는 소설이나 명청 소품문 자체에 대하여 크게 부정하지는 않았다. 젊은 시절 소품체를 본떠 시를 짓기도 하였고, 특히 후손들에게 『서상기(西廂記)』를 읽어야 할 책으로 지목하기도 하였다. 이 점이 똑같이 고문(古文)을 존중하였던 동시대 다산과의 차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산에 비해 좀더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명예와 권력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연마와 자기수양에만 매진한 가난한 선비였다. 그의 『문통』을 보면 제대로 성책(成冊)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쓰다 남은 손바닥 만한 종이를 엮어서 만들었다. 이런 『문통』은 가난한 선비 서파가 고난 속에서 얼마나 고생하면서 어렵게 공부를 했는지 잘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진정한 한사(寒士)라 할 수 있다.

 

그는 고민인이었다. 조그만 오두막에 살면서도 마음은 백성과 나라에 있었고, 비록 현세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먼 훗날을 기약하면서 힘겨운 집필을 이어나갔다. 그는 무척이나 가난해도, 인정을 받지 못해도, 적막한 소외를 느끼어도, 학문이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이기에 그런 고난을 감내하며 전심전력을 다해 연찬(硏鑽)하였다.

 

류희의 무덤은 행정구역상으로 용인시 모현읍 왕산리 산85번지에 자리하는데,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뒷산이다. 현재 그의 무덤은 비지정문화재라 지자체의 관리와 보호 대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용인의 문화유산으로 공식적인 홍보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의 학문적 업적에 비추어 문화재로 지정하기에 충분하다. 용인시의 관심과 홍보 속에 서파 류희가 우리나라의 역사 인물로 부각되고, 그의 학술적 성과가 용인의 문화자원으로 널리 활용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