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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타파 / 역사는 미래다 ②

‘서인 노론 정권의 100년 저항을 뚫고
완성된 대동법을 허(許)하라’

파란만장 했던 즉위식을 끝낸 광해군의 거침없는 개혁의 시작은 ‘소득의 분배와 조세정의의 실현’이었다.

1608년 영의정 이원익은 “각 고을의 진상(進上)과 공물이 관아의 방납인에게 막혀, 물건의 값이 3~4배 또는 수십 배에 이르며, 특히 경기도가 심합니다”라며 공납 대신에 1결당 쌀12두 징수를 건의 한다.

광해군의 교지에 선혜(宣惠)라는 말을 관청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표현 그대로 왕의 결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92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임진왜란을 세자의 신분으로 백성들과 함께 전쟁의 참화를 경험하고 극복한 광해군 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623년 3월,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성리학적 명분론을 근거로 연합한 서인과 남인에 의한 인조반정의 근본 속셈은 과다 세금 징수를 자행한(?) 광해군에 대한 저항 이었던가?

반정공신 이괄은 1624년 1월에 군사를 일으켜 한양에 무혈입성 한다. 허둥지둥 공주로 피신한 인조와 서인정권과 반란군에 의해 궁궐이 점령된 미증유의 사태에도 평온한 백성들의 일상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대의명분은 물론 현실명분 조차도 갖고 있지 못한 서인 내부에서 벌어진 논공행상의 추악성을 조선 백성들은 이미 분명하게 파악한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개혁의 방향은 분명했다.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개혁, 즉 대동법의 전국 실시. 광해군이 시작한(경기도 우선 실시) 조세정의를 확고히 시행하는 것이었다.

많이 버는 자에게 조금 더 많이 거둔 세금을 조금 버는 자들에게 혜택을 나누어 주는 최소한의 사회통합을 위한 안전망 확보였다.

초유의 전란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 되고 권력과 토지를 가진 자들의 위선과 리더십의 붕괴를 회복하는 길은 극심한 불신과 증오를 완화 시켜야 했다.

조선의 백성들에게 광해군 15년의 정치적 경험과 조세정의에 대한 확신은 분명하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망가진 조선사회를 위해 대동법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만약에(부질없는 가설은 속절없이 허탈하지만) 인조반정 이후에 서인과 남인의 지배층들이 자신들에게 부과된 공납을 원칙대로 토지의 결수에 따라 납부한 대동법의 시행을 서둘렀더라면 자본주의 형태의 경제 구조가 빨리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삼도(下三道)인 충청·전라·경상도의 지주들이 격렬하게 반대한 대동법은 시행 백년 째인 숙종 34년인 1708년에 마무리 됐다. 우리 역사에 드문 개혁의 완성이었으며, 개혁 피로증과 조급증에 지치지 않은 김육을 비롯한 개혁관료와 이름 없는 백성들이 이룩한 승리였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에게 효종은 묻는다. “호서(湖西)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니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1651년 (효종2년) 충청도에 실시된 대동법을 강력하게 반대한 송시열은 말한다. “편리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니 좋은 법입니다”

400여 년 전에 진행된 대동법 논쟁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이어진다. ‘소득 있는 곳에 과세 있다’는 원칙과 ‘소득이 많은 자가 좀 더 많이 내야한다’는 주장에 대해 세금폭탄 이라는 주장은 여전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