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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장군이다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원리를 통달 하였고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꿰뚫 었으며
전쟁에서 이겨 공 또한 이미 높으니
족한 줄을 알고 그만 돌아감이 어떠한가

612년 살수대첩의 주인공 을지문덕이 수나라 사령관 우중문에게 보낸 [여수장 우중문시]로 현존하는 최고의 시 다. 이 시는 문학사적 뿐만 아니라 수준높은 문장으로 을지문덕 장군이 문(文)과 무(武)에 능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최대의 승전이었던 살수대첩 당시 고구려의 총사령관 을지문덕은 누구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는 것이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 태어난 곳은 어디인지, 부모는 누구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남북조 300년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을지문덕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했던 것으로 볼 때 612년 이전부터 중국에는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의 113만 대군이 요동으로 진군할 때 고구려가 전개한 수성전(守城戰)·지구전(持久戰)·유인전(誘引戰)·기습전을 지휘한 을지문덕의 출신은 어디일까?

단일민족을 강조했던 그간의 역사 교과서에서 금기시 했던 을지문덕의 이민족 출신설에 대해 추론해 보련다. 북송의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위지문덕(尉支文德)이라 기록하고 있다.

‘을’이 ‘위’로 잘못 기록된 것일 수도 있으나 위지(尉支)는 윈래 북위를 세운 선비족의 성으로 위지(尉遲)라고 불렀다. 당 태종때에 활동한 위지경덕(尉遲敬德)도 그 일족이라 한다.

남북조와 수·당 교체기의 혼란기에 유목민족의 후손들 중에서 개인의 능력에 의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지경덕처럼 을지문덕은 중국이 아닌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일지 도 모른다. (우리 역사학계는 전국시대와 진·한 교체기에 한반도로 유입된 위만세력이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개국한 것에 대해 유연하게 해석하고 있다.)

고대인들의 대다수가 성(性)이 없었던 것처럼, 을지문덕의 성을 ‘을지’라고 할 것인지 ‘을’이 성이고 ‘지’는 존칭의 의미일 것이라며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일대에 걸친 대제국 고구려는 예족과 맥족은 물론 말갈족과 거란족 등의 다양한 종족들이 있었다. 초원길을 달려 오늘날의 우즈벡 사마르칸트 인근 아프랍시압 궁전벽화에 남겨진 새깃을 꽂고 모자를 쓴 고구려인의 모습을 볼 때 출신지와 혈통 뿐만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인정해 준 사회였다.

현재의 민족적 가치관을 역사에 투영해 버린 교과서의 단일민족 관점이 잔상으로 남아있지만, 민족은 처음부터 고정불변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역사발전의 결과물이다. 삼국의 치열한 한강 쟁탈전과 수·당에게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는 백제와 신라의 지배층을 보면 삼국통일 이전의 고대사에서 민족 개념은 고무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을지문덕이 설사 초원을 떠돌던 유목민의 후손이었다 한들, 612년 수양제의 별동대 30만을 물리친 고구려의 장군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제19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귀화인 이자스민에 대한 곱지않은 앙금이 남아있는 우리사회에서 을지문덕의 출신 문제도 현재 진행형 이라면 지나친 것일까? 우문에서 현답을 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