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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간섭기의 고려 - 4명의 왕, 여덟 번을 즉위하다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 식민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단 한차례이다.

1910년부터 1945년 일본의 지배를 받은 시기 뿐이다. 하지만 좀 더 냉정하게 보자면 1945년부터 1948년 까지 미 군정의 지배를 받은 것과 고려말기의 원 간섭기도 식민지와 비슷한 경험이다.

중국 왕조에 대해 사대는 했어도 정치구조의 완전한 형태로서의 지배는 한족이 아닌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시기가 최초였다. 역사교과서에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다’와 ‘자주성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건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뜻의 온건한 표현일 것이다.

요즘 방송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무신]에서 장엄한 전쟁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몽골의 침략에 맞선 것은 고려의 군대 보다는 일반 민중의 처절한 생존싸움이었다.

1231년 살리타의 침입으로 시작된 몽골의 공격은 28년간 7번 동안이나 계속됐다. 강화도에 갖혀 있던 고려의 고종이 1259년 태자를 인질로 보내는 항복의 조건으로 전쟁은 끝났다. 인질로 갔던 태자가 귀국하여 원종으로 즉위한 시기에는 항복은 했지만 원의 직접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이후 벌어진 개경환도와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과정에서 원나라는 다루가치를 설치한다. 다루가치란 진압하는 자라는 의미로 몽골의 관직이다. 총독부와 비슷한 의미로 1278년 충렬왕 시기까지 존재한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원 세조)의 부마가 되므로 다루가치의 폐지는 사위를 대리왕으로 임명하여 고려를 대리통치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왕의 묘호에 조(祖)와 종(宗)을 사용하지 못한 충렬왕부터 공양왕까지는 독립된 국가 형태로서의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의 반증이다. 공민왕때에 원은 망했지만 친원세력은 고려말까지 세력을 잡고 있었다. 더구나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일곱명은 원 황족의 사위로서의 자격을 가지고서야 왕에 임명되었다. 그 가운데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은 재위기간중 두 번씩 즉위한 이력을 지녔다.

1297년 충렬왕의 아들 장(충선왕)은 어머니가 죽자 원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신하들을 죽이고 행패를 부린다. 보다못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원나라의 힘으로 아버지를 몰아낸 충선왕의 의욕은 7개월만에 아버지에게 왕위를 넘기고 원나라로 돌아가 버린다.(아들이 아버지에게 양위한 사례가 있을까?)

1308년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하지만 그는 두달만에 원으로 돌아가 귀국하지 않고 살다가 죽었다. 충숙왕 역시도 왕위에 뜻이 없던차에 심양왕왕고의 왕위 찬탈사건이 일어나자 충혜왕에게 양위한다. 충혜왕이 나이가 어려 문제가 생기자 2년만에 다시 복위하고, 충숙왕 사후에 충혜왕이 다시 즉위하는데 그는 고려왕 최대의 패륜왕으로 원에 의해 귀양도중에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일국의 왕위를 장난처럼 주고받은 고려의 왕들은 정사를 돌보기 위한 왕이 아닌 누가 더 원나라에게 필요하느냐에 따라 왕이 된 것이다.

충목왕에게 원의 순종이 “너는 아버지를 배우겠느냐, 어머니를 배우겠느냐”고 묻자 선뜻 “어머니를 배우겠습니다”하고 대답하여 여덟살의 어린아이게 고려왕위를 맡길 정도였다.

때문에 반원자주 정책을 강행했던 고려의 공민왕이 살해된 것은 멸망한 원나라가 아닌 신생국가 명나라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중국왕조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내부적인 역량강화를 만들지 못한 고려가 결국 위화도 회군(원의 직속령이라고 주장한 명의 철령위 사건과 연관)의 내부분열로 멸망한 것은 제 힘으로 외세의 간섭을 몰아내지 못한 후유증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