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 구름조금동두천 20.7℃
  • 맑음강릉 16.9℃
  • 구름조금서울 21.8℃
  • 맑음대전 22.4℃
  • 맑음대구 24.3℃
  • 맑음울산 20.1℃
  • 맑음광주 22.5℃
  • 맑음부산 19.2℃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0.8℃
  • 구름많음강화 18.7℃
  • 맑음보은 22.7℃
  • 맑음금산 21.7℃
  • 맑음강진군 23.2℃
  • 맑음경주시 20.0℃
  • 맑음거제 22.6℃
기상청 제공

신라의 화백회의는 민주주의의 원형이었던가?

진덕여왕 때에 알천·임종·호림·술종·유신·염장이 남산 무지암에 모였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좌석 가운데로 뛰어들자 모두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태연히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메어쳐 죽였다. 알천의 힘이 이와 같으므로 회의의 첫 자리에 앉았으나, 사람들은 모두 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로 신라 최고의 귀족들이 회의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신라에는 성스러운 장소가 네 곳이 있어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대신들이 그곳에 모여 의논하면 반드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라고 써있다. 이 성스러운 장소들이 동쪽의 청송산, 남쪽의 무지암, 서쪽의 피전, 북쪽의 금강산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화백’이라는 회의의 명칭은 중국의 <신당서>에 최초로 나타나는데, 통일 신라 이전에는 다르게 불렀을 수 도 있다는 의미이다. 회의 장소가 대부분 산봉우리,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개최한 것으로 볼 때 아주 오래전부터 신성시 된 곳이다. 이는 부족사회의 공동집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6촌(村)락에서 출발한 신라가 어느 정도의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인 6부(部) 사회체제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하나라도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국가의 운영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만장일치라는 전통이 나온 것이다.

6부의 대표자들에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국왕 선출이었다. 신라 초기에 박·석·김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회의체를 통해 왕이 선출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왕이 죽고 아들이 없거나 나이가 어린 경우에, 국인(國人)이 모여 왕을 추대한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국인은 6부의 대표자들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화백회의는 민주주의 제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런데도 화백회의가 우리 고유의 토착화된 민주주의 원형처럼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신정권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00%에 가까운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선출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완벽한 ‘한국적 민주주의’라던 시절에 주입된 교육의 효과는 아닐까?

과거에 존재한 제도나 관습을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지식 없이 이해하는 것이 몰 역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화백회의는 일방적인 왕권 견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오늘날 행정부를 감사하는 의회와의 유사성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왕에 대한 견제 목적은 귀족들의 이해를 위한 것이고, 회의에 참가하는 층은 최고 귀족에 국한 되었다. 따라서 법 앞에서 평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들을 대변하는 의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기능과 형식이 비슷하다고 해서 화백회의를 민주주의의 원형이라고 판단한다면, 모든 역사적 사건과 내용에 대해 오늘의 입장에서 재해석이 가능해져 버린다.

형식상이라도 만장일치 회의체였던 회백회의였지만 동등한 결정권을 내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알천공이 호랑이를 때려잡을 정도로 담력이 커서 회의를 주관하는 첫 자리에 앉았지만 사람들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김유신을 두려워 한 것이다. 진덕여왕이 죽은뒤, 회의에서 국왕후보로 거론된 알천이 김유신과 결탁한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하니 말이다.

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뽑았던 시절이 오래전 일이 아니다. 체육관에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율로 당선된 대통령은 우리가 직접 뽑을 수 있는 대통령이 아니었다. 화백회의에서 선출된 국왕들이 통치한 신라가 중앙집권이 늦어진 이유가 만장일치 때문이었다면 지나친 역사의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