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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은 정녕 신동의 아들인가? 그렇다면 생모는?

고려시대 어디에도 신우가 신돈을 닮았다는 기록은 없는데...

고려사 열전에 신우로 기록된 우왕과 신창으로 기록된 창왕. 이성계와 급진파 정도전 세력에 의해 신돈의 자식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우왕은 누가 낳은 아들일까? 정말 신돈의 여종 반야의 아들인가? 보통, 사극에서는 노국대장공주(통칭 공주)가 죽고 공민왕이 방황하다가 신돈의 집에서 공주와 닮은 반야와 동침하고 태어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바로 우왕이 태어난 생년이다. 우왕은 1365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1365년 2월 공주가 노산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 기록이 다 사실이려면 우왕은 공주가 죽은 후 바로 잉태되었거나, 공주가 살아 있을 때 잉태되었어야 한다. 문제는 너무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가능한 것은 공주가 살아 있을 때 아이를 가졌어야 한다는 것. 아니라면 아이를 가진 여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신돈의 집에 위탁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까지도 신돈은 공민왕이 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으니깐.

사극에서 등장하는 공주는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공민왕 즉위와 반원자주 정책의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인정하지만, 어찌되었던 투기가 심한 몽골 여인 이었다.

그런 성격을 알았던 공민왕이 우왕의 생모인 반야를 신돈의 집에 위탁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신돈이 공민왕 원자의 모후를 보호하고 있었다는 점은 정계 진출과 신뢰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신돈은 공주가 죽은 1365년 이후부터 공민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처리한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 추론에도 문제가 생긴다. 이후 행적을 보면 공민왕은 철저히 반야를 잊은 듯하다. 공주가 죽은 후 공황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원자 탄생은 반드시 공민왕과 대비전에 보고되었을 것이다.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8살 모니노의 존재를 말하고 데려온다. 또한 반야에게 내명부 직첩을 내리고 후궁 정도로 예우할 수 있음에도 그녀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공민왕은 물론이거니와 태후를 비롯한 궁궐내부에서도 반야는 철저히 무시됐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반야는 그냥 양육자였지 생모가 아니었다는 것일까? 반야가 모니노를 기르는 도중 자신의 아이라는 착각(?)에 빠졌을 수도 있고, 왕의 아들을 키우다 보니 욕심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민왕과 왕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물질적인 보상을 원했다면 그럭저럭 보상을 해주었을지도 모르나, 반야의 철없는(?)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 우왕의 생모는, 공민왕이 말한 대로 궁인 한씨 소생일 수 있다. 한씨가 아이를 가졌고 신돈의 집으로 가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을 수 있다. 또 하나는 공주 소생이라는 것. 우리는 공주가 난산 끝에 죽었다고 알고 있지만 아이에 대해서 고려사는 침묵한다. 망한 몽골 공주의 소생이 고려의 왕이란 사실을 명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급진파 사대부들에겐 지우고 싶은 흔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왕이나 창왕이 공민왕의 직계가 아니었다면 최영은 왜 우왕에게 자기의 딸을 시집 보냈을까? 신돈을 누구보다 싫어했던 최영이 아니었던가? 위화도 회군 후 우왕을 폐한 후 후계자를 정해달라고 부탁하는 조민수에게 목은 이색은 왜 창왕을 말했던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왕의 외모가 공민왕을 닮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신돈의 핏줄이라고 기록한 고려사 어디에도 신우가 신돈을 닮았다는 기록은 왜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