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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한 편-106

달팽이


전다형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무기수였다 평생을 독방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외출을 했다 그의 따뜻한 집이 슬픈 감옥이었다 절벽 앞에는 겹겹의 어둠이 보초를 섰다 온몸으로 푸른 감옥을 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집이 있어 짐이 되었다

창문도 없는 감방에서 제 살을 파먹으며 젖은 슬픔을 말렸다

비가 감옥의 문을 열었다 굳게 닫힌 귀를 열고 안테나를 높이 세웠다 온몸으로 바닥을 읽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마른 길에게 부드러운 속살 다 파 먹히고 겨울 무논에 빈 껍질로 둥둥 떠 있었다 네 어미의 어미가 그랬다 살아서 감옥이던 집 네 어미의 자궁을 열고 네가 태어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집 슬픈 감옥을 죽어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무기수 아닌 인생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종신형, 지상에 머물다가는 형량만 다를 뿐 우리는 너나없이 한 평 독방 신세의 죄인들이다. 누군 팔십에 죽고 누군 삼십에 죽는다. 20평 아파트에서 30평 아파트로, 다시 45평 아파트로 평생 대출금을 등에 지고 옮겨 다니다가 죽고 난 뒤 묘지 반 평 혹은 납골당 두 뼘 유골함에 들어가는 것이 이 땅에 사는 달팽이족의 일생이다. 집이 감옥이다. 아이들은 가출이라는 이름으로 탈옥을 감행하고, 어른들은 투자라는 이름으로 어깨 위에 집을 한 채 더 얹는다. 집이 곧 짐이 되는 세상이다. ‘지옥은 확실히 아래에 있다(「지옥에서 보낸 한 철」)’던 랭보의 말처럼, 우리는 달팽이 껍질 같은 ‘슬픈 감옥’인 아파트를 죽음에 이르러서야 빠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