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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를 위한 변명 - 그는 왜 폭군이 되었을까?

[고구려의 옛 도읍은 황폐해진지 비록 오래 되었으나 고적은 아직 남아 있다……마땅히 백성들을 옮겨 그곳에서 살게 함으로써 국가의 변방을 공고히 하여 백세의 이익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김종서가 책임편수관이 되어 편찬된 고려왕조의 정사(正史)인 고려사에 나오는 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관련 발언으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도 고려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구려 계승보다 신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삼한일통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의 왕건은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기 전에 이미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태봉의 궁예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왕이 되었다. 때문에 왕건을 비롯한 고려의 건국 세력들의 입장에서 궁예는 부정적인 인물로 남겨놓아야 할 인물이 되었다. 실제 왜곡된 기록이라 할지라도 궁예가 현재적 관점에서 도덕적이고 자비로운 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궁예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전기의 <삼국사기>와 후기의 <제왕운기>는 물론 조선의 <고려사>서술에서도 포악무도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 궁예는 출생부터 불운한 사람이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되어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삶과 죽음의 문턱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이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고 세달사에 의탁하여 선종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 이후에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한반도 중부지역을 장악하고 송악의 호족인 왕건 부자의 지원을 받아 901년 후고구려를 세웠다. 고구려의 옛땅이었던 지역민심을 이용하는 정치적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 왕건과의 연합이며 고구려 계승 이었다. 이후에는 자신의 독자적 왕권강화를 위해 불교적 색채를 강하게 내세우는 마진과 태봉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미륵사상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잡아보려고도 한다.

하지만 궁예의 정치적 판단은 호족들의 역학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궁예의 측근들은 미천한 신분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정치적 미숙성과 조급성을 보이면서 급격히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운영에 기득권을 놓칠 것을 우려한 호족들의 집단적인 저항을 받게 된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에도 물고문과 전기고문, 민간인 사찰과 강제연행과 무차별적인 정권의 폭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 하물며 후삼국의 극심한 대립기였던 10세기 초반에 성리학적 논리로 궁예를 폭군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성리학이 절대화 된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진행된 붕당의 환국기에도 상대당을 공격하기 위한 심문 과정에서 고문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잔혹성은 역사 속에 등장하는 어느 왕에게나 공통적인 문제다. 궁예가 부정한 여인으로 의심하여 고문 끝에 두 아들과 부인을 죽였다는 것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비난할 일이지 유교적 도덕관으로 비판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출신성분 조차 모르는 궁예에게 머리를 조아린 호족들의 권위를 깎아 내린 궁예, 북방 진출을 주장하는 무도한 궁예, 성리학적 군주의 표상에서 배척해야할 궁예였기에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에서도 복권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천년동안 지속된 신라와의 단절,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하며 지역주의를 극복하고자 한 궁예가 꿈꾼 사회는 마진과 태봉으로 보여지는 이상사회로의 귀결이었을까? 그렇다면 궁예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왕이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