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
이 영 광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것 같을 때면 어디
섬으로 가고 싶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결별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떻게 죄짓고 어떻게 벌 받아야 하는지
힘없이 알 것 같을 때는 어디든
무인도로 가고 싶다
가서, 무인도의 밤 무인도의 감옥을,
그 망망대해를 수혈 받고 싶다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견디고 안녕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만 살아야 하는지
캄캄히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밤이면 반드시,
그 절해고도에 가고 싶다
돌이 되는 시간으로 절반을 살고
시간이 되는 돌로 절반을 살면,
다시는 여기 오지 말거라
머릿속 메모리 칩을 그 천국에 압수 당하고
만기 출소해서
이 신기한 지옥으로, 처음 보는 곳으로
두리번두리번 또 건너오고 싶다
이영광은 ‘알 것 같은’과 ‘알아버린 것 같은’ 사이에 시의 풍경들을 놓는다. 그가 가고 싶은 무인도는 온전한 깨달음의 공간이다. ‘알 것 같은’ 혹은 ‘알아버린 것 같은’ 미심쩍음은 그 공간에 닿아야 시원하게 풀리고 모든 미몽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무인도의 밤이나 무인도의 감옥이나 무인도의 망망대해를 수혈 받는다는 것은 깨달음에 다름 아니다. 무인도에 가면, 알 것 같았던 미몽이 깨어질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시어는 ‘힘없이’와 ‘캄캄히’다. 알 것 같은데 '힘없이’‘알 것 같은데’‘캄캄’한 무기력의 미몽은 그를 더 못 견디게 했을 것이다.
이 시의 비의는 ‘돌이 되는 시간으로 절반을 살고/시간이 되는 돌로 절반을 살면’이다. 무인도에서 돌이 되는 시간으로 절반을 살고 시간이 되는 돌로 절반을 살아야 모든 기억을 지우고 그곳을 나올 수 있다는 가정이지만 돌과 시간의 엉뚱한 대비가 시를 읽는데 턱하고 걸린다.
시간이 돌이 된다는 말은 현재가 과거가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 반대 일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니까 과거를 되돌려 반을 살고 쯤으로 읽어도 무방한 것은 아닐까. 돌이 되는 시간이 과거라면 시간이 되는 돌은 미래라고 읽어도 될 것이다. 현재는 돌이 되는 시간과 시간이 되는 돌에 모두 걸린다. 무인도에서 과거와 미래를 반반씩 살다 신기한 지옥, 현실세계로 돌아오고 싶다는 이영광이다. 김윤배/시인<용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