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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이우현이 가다!
중앙아시아 항일운동가와
카레예츠를 찾아서


“김병화 선생은 고려인의 거목” 장 에밀리아 할머니 생생 증언


용인신문은 ‘3.1운동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가인 홍범도 장군이 잠들어있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와 우즈베키스탄에 생존중인 고려인 1세대들을 취재해 보도하기로 했다이번 기획은 지난 21일부터 29일까지 중앙아시아 전문가이자 더불어민주당 내 ‘3·1운동 ·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특위’ 집행위원을 맡은 이우현(용인병지역위원장과 공동으로 추진한 동행 취재 연재물이다.어려운 여건과 촉박한 일정에도 동행 취재에 적극 협조해준 이 위원장과 현지 안내와 통역을 맡아준 키르기스스탄의 졸도쉬와 마흐무트그리고 우즈벡키스탄 국립체대 백문종 교수타슈켄트 세종학당 허선행 학당장타슈켄트 아리랑 요양원 김나영 원장민족지도자 황만금 선생의 둘째아들 황스타니슬라브씨 등 수많은 고려인들과 교민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편집자 주>

 

카자흐스탄의 홍범도 장군묘역을 찾아

아리랑 요양원’ 고려인 1세대를 만나다

고려인 민족지도자 황만금과 폴리따제

고려인 노동영웅 북극성지도자 김병화


장 에밀리아 할머니가 들려준 김병화 선생과 한인농장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지금도 현지 고려인들이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는 인물이 있다. 지난 호에 소개한 구소련 집단농장 폴리따제지도자 황만금(1919~1997)보다 14년 먼저 태어나 고려인 집단농장의 전설을 만들었던 김병화 선생(1905~1974)이 주인공이다타슈켄트를 가는 한국인들은 의례히 김병화 박물관을 찾곤 한다. 말이 박물관이지, 우리나라로 치면 작은 유물 전시관 수준에 불과하다. 학예사는 고사하고 상주 관리인조차 없으니 찾는 발길 또한 거의 없다. 이따금 한국인들이 찾아오면 예약 시간에 맞춰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바로 김병화 선생과 박물관을 소개하는 장 에밀리아 할머니다. 그녀가 관장 겸 관리인인 셈이다.

 

#김병화 박물관과 장 에밀리아 할머니

 



이우현 위원장과 기자는 여러 차례 김병화 박물관을 방문한 바 있다. 이번에도 김병화 박물관을 갔으나 고려인 4세 따냐의 안내로 지난 해 가을, 장 에밀리아를 만나 인터뷰했던 내용과 남아있는 기록으로 노동영웅 김병화 선생을 재조명한다.


햇살이 따사롭던 지난 가을, 기자와 함께 방문한 이우현 위원장을 장 할머니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우리 나이로 80세였다. 그런데 몇 년 전 방문했을 때와는 뭔가 다른 변화가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장 할머니가 새롭게 사랑을 만났다는 따냐의 귀뜸이다. 곱게 화장을 하고, 흰 브라우스에 선그라스와 모자까지 쓴 장 할머니. 우리는 장할머니의 제2인생을 응원했다.   


그런 장 할머니가 바로 중앙아시아 한인 정착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산증인이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남원 태 씨다. 할머니가 장 씨로 성을 바꾼 것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러시아의 일반적 관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만큼이나 모국어에 능통했다.


1940년 생인 그녀는 김병화 농장 입구 토굴에서 태어났다. 강제 이주 3년 후 태어났으니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역사를 고스란히 겪어온 셈이다. 소비에트연방 시절 대학교육을 받은 할머니는 기억력이 비상했다. 10세 이전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인(고려인)의 중앙아시아 이주 이후 피나는 정착과정은 물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수교이전, 북한의 소식에도 정통했다. 할머니는 어제 일같이 자신이 겪은 옛날이야기를 실타래처럼 술술 풀어내었다.

 

#김병화, 북극성 집단농장 제5대 책임자 선출

 

장 할머니는 타슈켄트 인근의 김병화 집단농장에서 1952년부터 1974년까지 살았다. 연해주 시절부터 고려인들은 북극성 콜호즈에서 공동체 집단생활을 했다. 북극성 콜호즈는 연해주를 그리워하는 고려인들의 정서를 고스란히 이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김병화는 북극성 집단농장의 제5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스탈린 시절, 고려인에게는 여행의 자유가 없었다. 주민증도 주어지지 않았으니 소비에트연방의 인민도 아닌 셈이었다. 고려인에게는 거소증이라는 영주권 비슷한 신분증명서만 주어졌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고려인이 참전을 희망했지만 거부됐다. 스탈린은 철저하게 고려인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전쟁기간 중 고려인은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195335일 고려인을 극심하게 탄압했던 독재자 스탈린이 죽었다. 소비에트연방 공산당은 치열한 권력투쟁에 돌입했고 새로운 지도자가 부상했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흐루쇼프는 인민의 고통을 잘 아는 지도자였다. 흐루쇼프가 집권하고서부터 고려인에게도 공민증(주민등록증)이 주어지고, 여행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독재자 스탈린 죽고, 흐루쇼프는 고려인에 호의

 



김병화가 농장책임자가 되면서 '고려인 집단농장은 발전을 거듭했다. 농업용 비행기까지 보유했던 김병화 집단농장은 흐루쇼프 소비에트연방 공산당서기장 시절, 3250ha의 광활한 농토를 개간했다. 처음 100여 가구가 개척하기 시작한 김병화 농장은 전성기에는 1200여 가구까지 수용했다. 김병화는 연해주 시절부터 한인(고려인)농장을 조합 형태로 운영했다. 강제이주 이후 김병화는 중앙아시아 개척의 선구자였다.


흐루쇼프는 고려인에게 호의적이었다. 흐루쇼프시절부터 중앙아시아 이주 고려인 2세들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타슈켄트, 알마티, 노보시비르스크 등 대도시의 대학교에 유학할 수 있게 되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고려인들은 공산당 입당이 허용되었고, 관공서의 관리로 등용되기도 했다. 고려인 입장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은인이었다.

 

#김병화, 중앙아시아 항무지에서 논농사 성공

 

김병화는 연해주에서부터 한민족의 전통적인 논농사를 지었다. 그는 중앙아시아에 이주한 후에도 물을 이용한 벼농사에 성공했다. 초원과 억새밭뿐인 불모지를 개간하여 전통적인 논을 만들고 거기에 물을 대어 벼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까다로운 논농사임에도 불구하고 김병화 집단농장의 생산력은 중앙아시아는 물론 소비에트연방 전역에서도 최고였다.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이 직접 방문하여 고려인의 노력을 치하했다. 김병화 집단농장은 소비에트연방의 숙원사업이었던 농업혁명을 실증적으로 실천하였고 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를 달성하였다.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 개척의 선구자

황무지를 옥토로 일군 기적에 소련이 들썩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 직접 농장 방문

고려인 노력 치하 김병화 선생 영웅 대접


김병화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오적(五賊)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체결,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1905년 연해주 재피고우 청풍김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출생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고단한 삶을 예고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선생은 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4명의 형제와 병고(病苦)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빈곤의 유소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하던 선생은 기초교육과정 4년을 마치고 각고의 노력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적군 파르티잔 활동에 투신, 일본 간섭군에 맞서 싸웠다. 선생은 1927년 적군에 입대하여 모스크바 정치군사학교에 들어가 1932년 졸업했다. 선생은 카잔에서 중위로 진급하여 중대장이 되었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선생은 1938년 고려인 민족주의 당 조직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다음해인 1939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 강제전역 되었다. 선생의 최종계급은 적군대위였다. 그해 선생은 새로운 여정이라는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공화국 타슈켄트콜호즈(집단농장)에 들어가 건설관리직으로 일했다. 1940년 선생은 북극성콜호즈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북극성콜호즈는 목표의 4배까지 생산하여 평균 25%에 머물던 다른 농장의 16배나 되는 수확을 일구었다. 선생은 1945년 독소전쟁이 끝나자 조합원들에게 주택공급사업을 벌여 공동주택에서 살던 고려인에게 단독주택을 제공했다. 선생은 단 1년 만에 소비에트연방의 고질적인 고민거리였던 주택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했다.

 

#김병화에 사회주의 노력영웅 2번 내려

 


북극성 농장에는 6개의 학교와 우체국, 영화관, 자체발전소를 비롯하여 축구팀까지 있었다. 선생은 소비에트연방공산당이 궁극적인 목표로 제시했던 사회주의공동체사회를 자력으로 달성했다. 소비에트당국은 선생에게 사회주의노력영웅의 칭호를 두 번이나 내렸다.


북극성 고려인 집단농장은 전 소비에트연방의 모델이 되었고 주변의 집단농장들이 앞 다투어 북극성 농장에 편입되기를 희망하였다. 흐루쇼프는 집권기간 중 북극성 농장을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 소비에트연방 73년의 역사에서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두 번 이상 받은 사람은 205명에 불과하다. 선생은 중앙아시아농업혁명을 일구어 내고 1974년 영면하였다.


#소비에트연방 해체이후 역사의 뒤안길

 

타슈켄트에는 선생을 기리는 김병화 거리가 있었다. 이번에 가보니 거리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맥없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몰락하는 역사의 격동기를 반추(反芻)해 보았다. 북극성고려인농장 생산력의 1/4만이라도 목표를 달성했더라면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은 세계적인 강대국이자 복지국가로 지금도 건재했을 것이다. 북극성 고려인 집단농장은 한국인의 근면성과 창의적인 능력을 소비에트연방 전역(全域)에 각인 시켰다. 김병화 선생의 노력과 헌신에 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장 에밀리아 할머니는 한-소 수교 이전 북한에 몇 번 다녀왔다. 소비에트연방 시절에는 북한에서 고려인 농장 견학을 많이 왔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갈 수 없었던 땅, 중앙아시아에 이제, 한국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간다. 반면 북한사람은 중앙아시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2018년 기준,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한국인 교민 수는 4000여 명에 달한다.


김병화 박물관을 떠나면서 이우현 위원장이 장 에밀리아 할머니에게 북극성 농장의 역사를 기록한 책자를 몇 권 구입하고 약간의 용돈을 드리자 마지못해 받았다. 할머니는 스바 시바 발쇼이라고 말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라는 뜻의 러시아 말이다. 이 위원장은 장 에밀리아 할머니와의 소중한 인연을 평생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중앙아시아에 버려졌지만 굳건하게 살아남은 우리 동포를 잊지 않는 기억법일 것이라며….

<동행취재/ 본지 발행인 김종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