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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김학민 경기문화재단 이사장

“서초동 밝힌 촛불집회
검찰개혁 민의 용광로”



[용인신문] 민주화운동 투사에서 문화 운동가로, 출판인에서 작가로 변신을 거듭한 김학민(71) 경기문화재단 이사장.


지난 15일 여주 남한강변에 자리 잡은 그의 거처를 찾았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그의 집, 마당 원두막에서는 사람들이 막걸리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분들은 문단 내 어른인 구중서 시인을 비롯한 김 이시장의 문화예술계 지인들이었다. 한 달에 한번 모이는 자리로 멤버인 신경림 시인은 사정상 참석을 못했단다.


단층 구조의 전원주택임에도 별도의 공간인 2층엔 널찍한 서재 겸 사랑방이 꾸며져 있다. 누구든지 맘 편히 쉬고 갈수 있게끔 준비해 놓았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한번 쯤 꿈꾸는 전원생활.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사랑방에 앉아 2시간 남짓 인터뷰가 이어졌다.


기자가 김 이사장을 처음 인터뷰이로 만난 건 25년이 넘었다. 그가 학민사 대표로 있던 시절이었으니 꽤 오래전이다. 이번엔 <용인문학>명사초대석인터뷰를 위해 정연희 시인과 조태명 시인이 동행 했다.

 

무엇보다 여주에 정착한 경위가 궁금했다. 김 이사장은 용인과 여주를 잇던 수여선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엔 용인에서 가장 먼 수학여행지가 여주였단다. 수여선을 타고 여주까지 수학여행 왔던 일을 회고했다. 고향은 용인 기흥구 하갈동이지만 이젠 돌아갈 땅이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여주에 정착하게 됐다. 듣고 보니 인생 말년 전원생활을 위한 최적지처럼 보였다. 일주일에 한번은 수원에 있는 경기문화재단에 출근한다. 비상근이지만 책임감 때문이다. 인터뷰는 의례적으로 그의 초년 인생부터 민주화 투쟁을 하던 청년시절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먼저 최근 작가들의 시국선언에 대해 묻자 나라를 위해 상소를 올리던 과거 조선시대 전통으로부터 이어진 작가들의 숙명이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김 이사장의 부친은 5대 국회의원이었던 김윤식 의원이다. 어릴 적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때부터 신문을 통해 한자를 배웠고, 문화와 사회를 보는 눈을 떴다. 1967년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19744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 징역 15년을 언도 받고 복역 중 1975년 가석방됐다. 신경림 시인 소개로 낚시 잡지를 시작으로 잡지사 기자로, 편집자의 길을 걷게 됐다. 한길사 편집장과 학민사 대표로 활동하면서 책을 만들었지만, 발간 족족 판금이 될 정도로 색깔이 분명했다. 그가 관여해 발간했던 500여 종의 인문사회과학서적 중 대표작으로는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우상과 이성> <민족경제론> <해방전후사의 인식>등이 있다. 당시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겐 잊지 못할 책들이다.

 

1980년 전두환의 5·17쿠데타로 야당 정치인이었던 부친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당시 모진 고문을 회고했다. 박정희 10월 유신으로 엇나간 인생 때문에 대학을 27년 만에 졸업했다. 군사 독재 시절을 온몸으로 관통했던 그는 민주화투사나 저항적 지식인이란 강한 닉네임이 붙어 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문화운동가이자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야당 정치인이었던 아버님과 전두환 정권에 수감·모진 고문


최근 조국 사태보며 무기력증 총장 바뀌었지만 검찰은 불변


독립운동 김혁 장군 평전 집필 내년부터 3년간 쓸 계획 기대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민주주의자이고, 평화주의자이고, 문화주의자다. 나는 문화가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 이시장은 자신의 출판 치적으로 학민사에서 펴낸 <정본 백범일지: 친필본 김구 자서전 완역 해설>을 꼽았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이 일찌감치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일갈했던 것을 높이 평가했다. 백범이야말로 일찌감치 문화의 중요성과 우리 민족의 문화저력을 알았던 것이라고.

 

조국사태를 둘러싼 시국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이사장은 조국 사태와 관련, 매우 불편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사람들은 나쁜 정권이 교체되고, 좋은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세상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한사람의 생각에 모든 희망을 투영해온 게 사실이라고. 우리가 간과해 온 것이 자본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거대 권력을 주시하는 것이다. 쉽게 변하지 않는 검찰 권력 속성에 대한 무기력증이랄까. 대통령은 바뀌지만, 검찰은 총장이 바뀐다고 변하지 않는 것을 꼬집었다. 서초동 집회서 조국 수호라는 말이 불편했다고 고백했지만 왜 다수의 대중이 조국 수호를 외칠 수밖에 없는지도 느꼈다. 박근혜 탄핵 광화문 촛불집회와는 달리 중구난방인 서초동 집회 현장에서 오히려 검찰개혁을 열망하는 자연스러운 국민들의 요구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외부로부터 받은 큰 숙제를 하나 해결했다. 70~80년대 민주노조의 전설적인 원풍모방노조이야기다. 1982년도에 560명이 해고된 노조원 중 200여명이 37년간 연락하며 만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3년 전 이들 중 126명이 호응해 노동운동과 강제 해고이후 블랙리스트의 삶을 추적한 구술 증언이 나왔다. 17~18세에 해고되어 60대 전후가 된 여성들을 대상으로 4명이 구술 받은 것을 혼자 7~8개월 동안 총정리했다. 원고매수로 7000~8000매 짜리를 무려 네 번 봤고, 세권 분량의 원고를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는 숙제를 마친 홀가분한 마음과 만족감으로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앞으로 용인과 관련된 것 중에서는 내년부터 독립운동을 했던 김혁 장군 평전을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자료 수집 중에 있고, 대략 3년쯤으로 잡고 있다니 기대가 앞선다.


마지막으로 여성운동가로, 현재 사람과 평화’ 대표인 부인 양해경씨에 대해 물었다. 결혼 생활 41년째. “지금 생각하면 어렵고 험난한 세월을 어떻게 함께 살아왔는지 생각조차 안날 정도라며 평등한 부부로 서로의 관심과 삶의 방향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동지적 관계로 살아왔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같지만, 각자의 분야에서 다른 일을 하는 동지, 이젠 의리로 산다고 해야 하지 않나요?(웃음)”

 

1998년 경기문화재단 설립 초기 재단 문예진흥실장으로 있다가 지난 해 복귀한 김학민 이사장. 그는 음식 칼럼리스트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렇다고 음식을 만들거나 술을 빚지 않는다. 대신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인터뷰 중엔 여행자들에게 팁이 되는 맛있는 음식점 골라가는 방법까지 귀뜸한다. 실로 오랜 만에 김 이사장을 인터뷰하면서 다시 한 번 드는 생각은 나이가 들수록 지성과 풍류가 있어 보이는, 그야말로 고고한 선비의 품격이 느껴졌다.

 

김학민: 1948년 용인출생. 배재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예원예술대 문화예술대학원장,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 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1998년부터 2년 동안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으로 일했으며, 2011년부터는 이한열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2018년 경기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 임기는 2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