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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용인의 유일한 풍물…생동감 넘치는 전국 으뜸농악

80평생 풍물사랑 용인농악인…60년 혼이 깃든 고유농악 12채
삶의 뿌리를 찾아서 | 백암 흰바위 농악단장 차용성

   
 
들판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조비산. 용인 8경의 하나인 이 산을 마주하고 있는 마을이 백암면 용천리 율리마을이다. 65여 년 혼이 깃든 고유농악 12채를 구사하는 차용성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필자가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날 그는 경로당에서 여느 어르신들과 마찬가지로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활짝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인심 좋은 시골 할아버지였다. 그런 차단장은 독특한 판제와 양식을 갖추었으면서도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백암농악의 독보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자리를 옮겨 자택에서 앨범 등을 보며 인터뷰를 시작하자 비로소 그의 진면목을 하나하나 볼 수 있었다.

# 농악과의 인연
1928년에 태어나 무진년생인 차단장은 백암면 용천리 율리마을에서 4대독자로 태어나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차단장의 아버지가 안성군 보개면에 살다 이사해 왔는데 어느새 손자까지 두었으니 4대째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일제 때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우리는 배움의 기회라곤 ‘강습소‘밖에 없었어. 11살에 석천리 덕은에 있는 강습소에 들어갔지. 국문과 습자(붓글씨)와 함께 일본어를 배웠는데 조선인 선생이 가르쳤는데 옥산리, 석천리, 장평리, 용천리에서 약 80여명 정도가 함께 배웠지”
그렇게 차단장은 그곳에서 4년을 공부하다 백암소학교(초등학교) 분교격인 장평간이학교가 생겨 정식학교로 옮겼지만 그마저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도하차해야만 했다.
“당시 생활상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 아욱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밀기울을 쪄먹거나 보릿겨로 개떡을 만들어 먹었으니까. 꽁보리밥도 귀했던 시절이고 당시 우리 집은 남의 농사를 지으며 한 끼 한 끼 때우는 형편이었지”
일년 농사지어 빌려서 먹은 것 갚고 나면 쌀 한가마니는 커녕 한 말 밖에 남지 않았다. 또 빌려다 먹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생활이었다는 것.
차단장이 농악과의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이 되면서 부터다. 일제치하에서 압박 받았던 우리가락 농악은 해방을 맞으며 기지개를 펴게 됐다. 마을마다 두레패가 생겨났고 18살 청년 차용성은 배고픔을 면할 요량으로 풍물패에 들어갔다.
“모심기나 김매기 때면 깃대를 들고 농악을 앞세운 일군들의 흥을 돋우는 농악이 그렇게 좋았어. 풍물가락에 어깨춤이 덩실거리면 배고픔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힘이 솟는 거야. 아! 그래서 이거구나 생각했지”
차단장은 처음 소고를 치며 두레패에 낄 수 있었다. 그렇게 상모를 돌리던 그는 농악과 인연을 맺은 20년만에야 상쇠를 잡을 수 있었다.
차단장의 농악에 대한 숨은 끼는 그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는 상쇠를 잡고 수많은 대회에서 1등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가 이끈 농악패는 1960년 면민의 날 각 마을 대항전 준우승을 시작으로 안성, 이천, 충청, 음성 등의 민속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놓치지 않았다. 한 번은 안성 남사당패 소속으로 무형문화재급인 김기백 선생과도 겨루어 이긴 적이 있으니 실력으로 말하면 두말하면 잔소리가 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선생을 용인시 장기자랑대회에서도 인기상을 탈정도로 현대 가요도 잘한다고 한다.

#용인의 유일한 풍물 ‘백암농악’
(사)한국농악보존협회 정인삼 이사장은 “불과 20년 전만해도 경기도의 백암농악과 화성 정남농악을 전국에서 으뜸으로 꼽았지만 그 맥락을 이어주는 사람이 없다”며 우리 농악의 현주소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어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전국 농악경연대회에 보았던 백암농악의 생동감 있는 모습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용인의 백암농악을 극찬한다.
65여 년간 전통 농악 12채를 능숙하게 소화해 내고 규격을 넘어선 겹쇠 가락으로 진을 짜는 농악 최고의 상쇠 차용성(77세)선생. 농악얘기만 나오면 언제나 고유농악 12채의 전수에 대한 걱정을 앞세운다.
“12채에 대한 명칭이 모두 바뀌었어. 원래는 준비가락, 세마디가락, 자진가락, 길가락, 두마디가락, 동의삼작, 단체움직가락, 쩍찌가락, 춤가락, 12발상모, 광고가락, 고사가락 등인데 지금은 모두 새로운 말로 부르지, 그리고 대부분 6채나 7채정도 잘 알려진 것만 써먹어 용인에서 12채를 제대로 할 줄아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어”
그가 이끄는 백암농악은 상쇠, 부쇠, 징, 북, 장고, 법고, 잡색(탈, 노인, 양반, 여자), 영기, 농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판굿은 준비가락과 인사굿, 멍석말이, 길가락, 두마디 가락, 소고놀이, 상쇠놀이, 치배놀이, 들법고, 앉은 법고, 좌우치기, 기둥법고 놀이, 가위잽이, 당산벌림, 사퉁백이, 멍석말이, 인사굿, 행진 등을 마치고 퇴장한다.
차 단장은 “안성이나 평택농악은 가락에 있어서 백암농악과 큰 차이는 없지만 안성과 백암에는 피조리가 있는 대신 백암에는 법고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며 “잡색에서도 안성이나 평택에 없는 ‘탈’이 백암에는 있다”고 백암농악의 독창성을 설명했다.

# 가족사랑 고향사랑
차단장은 결혼을 빨리했다. 아버지가 50세가 돼서야 4대독자로 태어났으니 당연했을지 모른다. 그 결과 18살에 결혼 해 열 아이를 낳았다. 다만 두 아이는 어려서 잃고 막내딸마저 시집까지 보내고 잃어 가슴에 묻고 살고 있다. 한 평생을 살아가며 개인적으로 겪는 아픔도 있지만 한 시대가 안겨준 고통도 적지 않다. 6.25전쟁이 그랬다. 51년 1.4후퇴 때 국민병으로 소집돼 동생과 함께 나갔다.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후퇴도중 벼랑으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병원에 후송돼 6개월을 있다가 중도 제대했다. 그나마 그는 목숨은 건졌지만 동생은 돌아오질 못했다.
고향이라고 평온하질 못했다. 세상이 바뀔 때마다 상처가 컸다. 대한청년단원이었던 그는 이북이 점령하자 민청위원회 선전위원에 강제로 떠밀렸으니 말이다. 마을에서 8년간 이장을 보며 이젠 농사일 틈틈이 노인정에 모여 쉬고 있지만 돌아보면 그 어려운 세상을 어떻게 살았나 하는 생각뿐이다.
40~50대 때는 많은 자식들과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인근 장터를 떠돌며 장사를 예닐곱해 하기도 했다. 또 한 때는 채패에 빠져 없는 가산을 없애기도 했었다. 회한의 세월이다.
차단장은 그 후 가훈을 ‘인내’로 정하기도 했다.
차단장은 “가난 속에 고루 공부를 시키질 못했다. 가끔 자식 들을 모아 놓고 못 가르친 죄를 얘기 하지만 그래도 탈 없이 커 주었고 남들이 ‘애들 잘 뒀다’는 얘길 들으면 기쁨을 느끼곤 하지”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 용인의 유일한 풍물…첫 재현무대
신명의 판굿 ‘백암농악’을 복원·재현하는 무대가 지난 해 12월 10일 문예회관에서 열렸다. 용인전통문화연구소(소장 이건무)가 주최한 행사는 문화관광부 산하 전통예술국에서 시행하는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사업에 백암농악이 선정돼 지난 해 4월부터 백암농악 복원·재현사업을 추진해 왔으며 이번이 첫 재현 무대다.
이날 공연은 차용성 옹의 비나리를 시작으로 아들 차진복씨의 태평소 소리, 용인국악과 타악전공 학생들의 장단, 정지윤 무용단의 부채춤 등 신명나는 무대와 흰바위 농악단의 백암농악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백암농악은 다른 지역의 농악과는 다르게 독특한 판제와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백암지역에서 우시장이 설 때마다 연희돼 시민들의 흥을 돋웠던 용인지역의 전통문화 유산으로 남아있다.
남사당 이원보 명인의 뒤를 이은 남원명, 이필재, 김익수,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은 웃다리 풍물의 연희자인 차용성 옹이 4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흰바위농악단을 이끌고 있다.

# 흰바위농악단 발표회
백암농악의 얼을 되살리기 차 단장은 백암지역에서 ‘흰바위농악단’을 결성, 2006년 12월 3일 백암중학교 선진관에서 ‘제1회 흰바위농악단 발표회’를 열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11일 두 번째 발표회를 이어갔다.
쌀쌀한 날씨에도 지역인사들과 지역주민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행사는 차 단장의 비나리로 문을 열었다.
이어 경기민요, KBS국악대상을 수상한 김대석씨가 이끄는 안은반의 사물놀이, 한얼예술단의 부채춤 등 축하 공연이 펼쳐졌으며 모녀가 함께 농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명환 학생의 태평가, 창부타령 등 민요독창 공연, 인천강화농악단 천둥소리의 신명나는 공연이 이어졌다.
마지막 흰바위농악단 단원전체가 펼치는 백암판굿은 관람객 모두가 풍물가락에 흠뻑 취하게 했다.

# 12채 전수가 마지막 꿈
용인에서는 이제 백암농악 단 한 곳만이 남아 우리의 농악을 지키고 있다. 흰바위 농악단은 매주 한 두 번씩 연습을 하고 있다.
차단장은 “백암농악의 맥을 이어줄 사람을 찾지 못해 아쉽다”며 “10여 년 동안 나에게 쇠를 배우고 있는 배소희 씨가 앞으로 백암농악을 이끌어 가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해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흰바위 농악단에서 태평소를 부는 차 단장의 셋째아들 진복(용인초 씨름감독)씨가 아버지로부터 농악을 배우고 있다.
“12채가 온전히 전수되는 꿈이 이루어질지 모르겠어. 65년 혼이 담긴 농악 12채는 단시간에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선생은 예총 국악지부 고문, 용인시 농악단장, 흰바위 농악단장을 역임하면서 지금도 주변 학교, 산악회 등 기회만 되면 한가락이라도 전파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용인문화원 김장환 사무국장은 “백암농악은 다른 지역의 농악과는 다르게 독특한 판제와 양식을 갖추었으면서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안성과 평택농악이 국가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처럼 하루빨리 우수성을 인정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용성선생의 각고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기원하며 65여 년 혼이 깃든 농악 12채가 온전히 전수되기를 기대해본다.

<차용성 약력>
쪾1928년 백암면 용천리에서 4대독자로 태어남
쪾1960년 7월 20일 면민의 날 각 마을대항전 준우승
쪾1980년 8월 20일 안성군민의 날 이죽면 대표로 상쇠출전 준우승
쪾1981년 9월 20일 이천군민의 날 설성면 대표로 상쇠출전, 1위
쪾1983년 7월 20일안성군민의 날 일죽면 대표로 상쇠출전, 1위
쪾1987년 9월 20일 음성군민의 날 금왕면 대표로 상쇠출전, 1위
쪾1990년 9월 30일 군민의 날 외사면 대표로 상쇠출전 1위
쪾1993년 9월 20일 군대항 민속놀이대회 용인군대표로 상쇠출전 1위
쪾1994년 5월 20일 용인문화원 가족장기자랑 출전, 인기상 수상
쪾1996년 8월 용인민주청년회 강사
쪾1997 나래초등학교 강사
쪾1997년 9월 25일 민속경연예술대회 용인시 대표 할미성 대동굿(여주공설운동장)
쪾1999년 9월 18일 용인시 대표로 민속경연대회 출전(두레싸움) 노력상
쪾1999년 10월 2일 각 면대항 농악놀이 백암면 대표 1위(용구문화제)
쪾2000년 9.30 용인시 문화예술부분 시민상 수상, 현재 용인시 국악협회 고문, 백암흰바위 농악단 단장
쪾2006년 12월 3일 제1회 흰바위농악단 발표회
쪾2007년 11월 11일 제2회 흰바위농악단 발표회
쪾2007년 12월 10일 ‘백암농악’을 복원·재현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