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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소쩍꿍♬ 소쩍꿍♬ 언제나 나는 ‘낙랑18세’

Close Up | 가수 한서경
6집 준비 구슬땀… “한 층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저고리 고름 말아 쥐고서 누구를 기다리나 낙랑 십팔세. 버들잎 지는 앞개울에서 소쩍새 울 때만을 기다립니다. 소쩍궁 소쩍궁 소쩍궁 소쩍궁 소쩍궁 새가 울기만 하면 떠나간 그리운 임 오신댔어요.”
1992년 청바지에 왈가닥 소녀 같은 모습의 여자가수가 등장해 발랄한 모습으로 원로가수 백난아의 낙랑18세를 리메이크한 곡을 선보였다.
빠른 랩핑이 섞인 낙랑18세는 흥겨움과 시원한 목소리로 당시여자가수로는 드물게 음반판매량 100만장을 돌파하기도 했다. 요즘 6집 준비로 눈코 뜰세 없이 바쁜 낙랑18세의 가수 한서경씨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 장애희망 ‘연예인’
6살부터 꿈이 가수였다는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끼로 똘똘 뭉친 아이였다. 소풍가면 사회를 보는 것이 당연했고 뒤에서 박수치기 보단 앞서서 노래하는 것이 좋았던 당당한 소녀였다.
“동네에서 저 모르면 간첩이었어요. 당시 최고의 가수였던 혜은이 선배님의 모창을 너무 똑같이 해서 정말 인기가 많았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통지표 장래희망란에 연예인이란 단어가 꼭 들어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데뷔해서 연예인이 되고나서도 연예인이 된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서귀포여고를 졸업하고 그녀는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다.
제주도에서 서울로 유학 간다는 것은 당시로서 대단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행을 택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생활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부모님께 큰 도움을 바랄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학비조달을 위해 6개의 아르바이트를 뛰어야만 했다.

#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의 모습과는 좀 달라보일지도 모르지만 대학시절 그녀는 락그룹의 보컬로 활동했었다. 거의 마니아라고 할 정도로 록에 심취해있던 그녀.
어쩌면 지금의 시원하게 내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런 기본기에서 비롯된 거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 그녀는 다운타운가에서 알아주는 여자 DJ로 활동을 펼쳤다. 당시는 여자DJ 구경하기 정말 힘든 시대였다고 한다. 그래도 그녀는 실력으로 당당이 인정받아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생활유지를 위한 아르바이트에 노래연습에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각오로 견뎌냈죠. 각종 가요제에 참가해 떨어진 것도 여러 번이에요. 추운 연습실에서 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연습에 연습을 했죠.”
어떻게 보면 도도해보이고 부족한 것 없이 자랐을 것 같은 그녀지만 지금의 성공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 인생의 전환점 낙랑18세
열심히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 한 회사에서 기획 상품으로 음반을 내자는 제의가 온 것. 그리고 1992년 1집 낙랑18세가 발표된다.
데뷔와 함께 그녀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만 해도 길거리, 커피숍이고 어디든지 낙랑18세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결국 그해 SBS, MBC 10대 가수가요제신인상을 모두 휩쓸고 최고의 신인 가수가 됐다.
그리고 다음해에도 2집 소양강처녀를 발표, 전성기를 이어갔다.
“갑자기 유명해지자 힘들게 지내온 시절들이 많은 도움이 됐구나하고 느껴지더라고요. 한번 인기를 실감해 보고 싶어서 화장도 안하고 모자와 선글라스만 쓰고 이대 앞에 나가 본적도 있어요. 결국 사람들이 모여들어 난리가 나고 말았죠.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이후 1996년 3집 ‘아리아리’, 1999년 4집 ‘이봐요’, 2004년 5집 ‘당신께 넘어갔나봐’ 등 세미트롯트 풍의 음반들로 사랑을 받아왔다.
이렇게 지금까지 정식음반 5장, 총9개의 앨범을 발표하며 아직도 꾸준히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그녀는 다운타운가 DJ출신답게 라디오 DJ로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불교방송 ‘백팔가요’, KBS ‘희망가요’, 교통방송 ‘가요운전석’, TBN 전국교통방송 ‘TBN차차차’ 등 많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해왔다.

# 어려운 이웃들의 위해
라디오 진행에 6집 음반 준비에 이렇게 바쁜 시간 중에도 그녀가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그녀의 고향인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매년 열고 있는 ‘한서경의 사랑 나누기 콘서트’가 바로 그것.
지난 2001년부터 펼치고 있는 자선공연의 수익금 전부는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해진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노래잖아요. 그래서 자선공연을 선택했어요.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고 이렇게라도 어려운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는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 뵙기가 힘들지만 공연 덕분에 일 년에 한번은 꼭 고향에 가게 돼 좋다고 한다.
“1년에 한번인데 정말 기대 되요. 제주도가 공연문화가 아직은 미흡하거든요. 아시는 동네 분들, 고향 동창들이 공연장에서 많은 도움을 줘요. 물론 함께 공연해 주시는 연예인분들도 많은 보람을 느끼시고요.”
올해는 오는 3월 2일 4번째 자선 콘서트를 갖는다. 특히 이번 콘서트는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데 수익금 전액을 사용한다.

# 아내로 엄마로 가수로
고된 연습 때문인지 요즘 그녀는 성대결절과 인후염으로 고생중이다. 5살 연하인 그녀의 남편은 이런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남편으로 또 매니저로 그녀의 일을 돕고 있다.
“결혼 한지 8년째에요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좋은 점이 많은 것 같아요. 남편이 옆을 지켜줘서 항상 든든하죠.”
부부에게는 6살 난 아이가 있다. 아직 엄마가 유명한 가수라는 사실을 크게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텔레비전에 모습이 나오면 녹화를 해 둘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바쁜 생활 속에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적다는 것이 늘 아쉽다는 그녀. 그래서 아이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아이에게 최선을 다한다.
“아침이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7시에 기상을 해요. 그리고 아이와 함께 아침밥을 꼭 먹죠.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하잖아요. 최소한 아이한테 만큼은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일로서 성공하는 것도 좋지만 그 못지않게 가정에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그녀.

# 앞으로 한서경은
그녀에게 음악의 어떤 의미냐고 묻자 단박에 “음악은 인생이다”라고 말한다.
17년을 음악과 함께한 그녀의 열정을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었다.
“하면 할수록 내가 부족한 게 너무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요. 스스로 내가 너무 실력이 없구나 느낄 적도 많았고 그래서 음악 공부를 하고 싶어요.”
새로운 앨범에서는 음악적으로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그녀. 그래서 노래는 물론 의상, 다이어트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가수가 되고 이번처럼 고민한 적은 처음이에요. 이번에는 정말 진짜 음반을 내고 싶어요. 신인으로 돌아간 자세로 더욱 더 열심히 할 거에요. ‘겨울 뒤엔 항상 봄이 온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렇게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려하고 있어요.”
가수로,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로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는 한서경. 인터뷰 내내 성실과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