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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한 편-5|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우기다. 비를 맞고 걸어본 사람은 처음엔 옷이 무겁다는 것을, 나중엔 몸이 무겁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딸아이의 초경을 바라보는 아비도 마흔 줄을 넘겼을 터, 그가 걸친 生이라는 이름의 가죽부대가 ‘끔찍하’게 느껴질 만도 할 것이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적, 나라고 왜 없었을까. 그러나 벗어날 수 없다면 견디자. 저물어 가는 하루, 세상 끝 나 혼자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땐 일을 놓고 잠시 ‘아름다운 폐인’이 되어보자. 비라도 내리는 날, 경안천변 흐린 주점에 앉아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들어주면서’ 남겨진 인생처럼 줄어든 ‘술잔의 수위’를 적막하게 바라보자, 그대여.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